미하일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과 문학의 카니발화*
*1)박 건 용**
【목차】∙∙∙∙∙∙∙∙∙∙∙∙∙∙∙∙∙∙∙∙∙∙∙∙∙∙∙∙∙∙∙∙∙
1. 머리말
2. 카니발
2.1. 카니발의 우주성과 부정성
2.2. 카니발의 육체성과 그로테스크
2.3. 카니발의 양가치성 - 죽음과 탄생
3. 민중성과 웃음
3.1. 카니발의 민중성과 비공식적인 말
3.2. 카니발적 웃음
3.3. 카니발 왕의 죽음과 축제의 의미
4. 카니발적 문학
4.1. 문학의 카니발화
4.2. 카니발화된 문학: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적 풍자
4.3.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성적 소설
5. 맺는 말
참고 문헌
Zusammenfassung
1. 머리말
이 글은 미하일 바흐친의 이론의 핵심적 내용의 하나인 카니발 개념과 카니발적 특성이 문학으로 전이되는 것을 의미하는 문학의 카니발화를 체계적으로 구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바흐친은 1940년 라블레의 문학과 카니발을 새로운 카니발 개념에 따라 분석한 ꡔ사실주의의 역사에서 프랑수아 라블레ꡕ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다. 바흐친은 그 이전에 ꡔ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의 문제점ꡕ(1929)에서 시작된 자신의 새로운 ‘소설의 시학’을 1930년대에 여러 저술을 통해서 확립하려고 시도하며 이 작업은 1940년대 전반까지 계속된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문학 일반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러시아 문학이 처한 상황, 즉 혁명세력이 톨스토이 문학을 이상적 혁명문학으로 찬양하고 1928년의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것과 1934년 제 1회 전체 소련 작가회의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의무적 창작방법으로 승인된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바흐친은 ꡔ도스토예프스키의 창작의 문제점ꡕ과 같은 해에 발표된 톨스토이의 드라마와 ꡔ부활ꡕ에 대한 서문에서 이미 혁명문학의 모델로 찬양되고 있던 톨스토이의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자신의 새로운 소설시학인 ‘다성적 소설 polyphoner Roman’의 관점에서 ‘모노로그’라고 일관되게 비판하였었다. 하지만 그가 반대하던 모노로그적 사실주의는 점차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정립되며, 1930년 무렵에는 대립적이었던 형식주의를 괴멸시키고 1934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작가의 유일한 문학양식으로 공식화된다. 그러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해 바흐친의 카니발 이론은 “사실주의의 새로운 개념”*1)으로서 카니발적 문학을 대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카니발 이론은 모노로그적 사실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소설에 관한 바흐친의 다른 논의들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바흐친은 1963년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저작을 ꡔ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의 문제점들ꡕ로 재출판하면서 카니발에 대한 내용을 추가하였다. 실제로 바흐친은 이미 1920년대 중반에 라블레에 대한 관심과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2) 그뤼벨에 따르면 카니발에 대한 내용은 이미 1929년 저술 당시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저작의 내용으로 계획되었던 것이었다고 한다.***3) 하지만 바흐친은 당시 아직 카니발화된 문학의 역사라는 틀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바라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며****4) 결국 카니발에 대한 이론은 라블레에 대한 저술을 거치고 30여년이 지난 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분석하기에 보다 더 적합한 것이 되어 비로소 원래 계획되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바흐친의 근원적인 화두는 그가 인문과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새로운 미적인 세계이해의 모델로 보았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었다. 그의 모든 지적인 노력은 결국 이것의 설명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이것의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사유의 체계의 확립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가 “새로운 예술적 세계모델”*****5)이라고 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본질적 특성은 다성구조였으며 그 다성구조의 언어적 관점에서의 한쪽 토대가 메타언어학이었다면 세계관적 관점에서의 또 다른 토대는 바로 카니발이었다. 메타언어학이 ꡔ도스토에프스키의 창작의 문제점들ꡕ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카니발은 라블레에 관한 저작*6)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그 둘은 ꡔ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의 문제점들ꡕ에서 뒤늦게 비로소 다성구조를 구성하는 하나가 되었다.
라블레의 소설이 르네상스 시대의 카니발화된 문학의 정점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카니발의 현대적 사유를 반영하는 독창적인 부활이었다. 이렇게 볼 때 카니발의 이해는 바흐친의 이론의 이해에 있어서 본질적이며 또한 바흐친이 그러한 것으로 규정한 오늘날의 문학의 이해를 위해서도 본질적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카니발의 특성을 규정하고 그 주체로서의 민중을 고찰하며 마지막으로 문학의 카니발화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다.
2. 카니발
2.1. 카니발의 우주성과 부정성
바흐친에게 축제는 인간문화의 아주 중요한 본원적인 형식이다. 이러한 축제는 항상 본질적이고 심오한 세계관적인 내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축제이기 위해서는 인간존재를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 그 경우 축제는 항상 시간성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데 그것은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축제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초월적인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위기와 변혁의 계기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제적인 세계관 속에서는 위기와 극복, 죽음과 부활, 변화와 갱생의 계기들이 항상 주도적이다.
카니발은 우주적인 성격을 지닌다. 바흐친은 그런 점에서 중세의 카니발에서보다 사투르누스가 황금시대의 지상으로 실제적이고 완전하게 귀환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로마의 사투르누스제에서 카니발의 본질이 보다 더 명료하게 나타난다고 본다.**7) 거기에는 모든 것이 순수하고 평등하였던 황금시대의 원리와 근원적인,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는 죽음과 탄생의 우주적인 갱생의 원리가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카니발은 우주적이기에 전면적이고 경계를 모른다. 카니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카니발적인 삶 이외의 다른 어떤 누구를 위한 삶도 존재하지 않으며 카니발을 피할 곳은 없다. 그것은 또한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지상의 모든 삶의 내용을 상대화시킨다는 점에서 우주적이며, 죽음과 부활이라는 근원적인 우주적 질서의 축제적 확인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지상의 모든 것을 다시 무한한 미래로 열어 놓는다는 점에서도 우주적이다. 이 우주성, 전면적이고 근원적인 갱생으로서의 세계의 근원적 질서에 대한 이해는 세계의 진정한 축제의 장소와 시간에서는 언제나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다 중세에 이르러 카니발로 부활하였다.
바흐친은 “카니발적인 세계이해 karnevalistisches Weltempfinden”의 본질을 “강렬하게 생동감 넘치며 변형하는 힘이며 다함이 없는 생명력”***8)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세계이해에 지배되는, 이러한 힘에 감염되어 있는 카니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특징지운다:
1) 연기자와 관객의 분리가 없는 모든 참여자의 능동적 참여와 의사소통
2) 일상적 정신에서 벗어난 전도된 삶
3) 일상적 상황의 질서로서 카니발 밖의 삶을 규정하는 법과 금지와 제한의 지양
4) 인간들 사이의 거리가 지양되고 자유롭고 친밀한 접촉의 등장
5) 카니발 밖에서는 전적으로 지배력을 발휘하는 모든 위계질서가 탈중심화되고 부적합하게 되며 인간본성의 숨겨진 측면이 드러나는 것이 가능해짐
6) 비카니발적인 세계관의 경우에서는 분리되고 격리되었던 모든 가치와 현상과 사항들, 즉 성스러운 것, 세속적인 것, 고귀한 것, 저속한 것, 위대한 것, 무용한 것, 현명한 것 및 어리석은 것의 카니발적인 만남과 결합
7) 지상의 육체의 생산력과 결부되는 카니발적 외설성, 격하와 저속화와 결부된 세속화. ****9)
이러한 카니발은 공식적인 축제와는 근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공식적인 축제가 기존의 질서와 가치와 규범을 공고히 하고 영속화하며, 불평등을 성화하는 지배적 진리의 승전제(勝戰祭)라고 할 수 있다면 죽음과 부활, 즉 갱생을 축하하는 카니발은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이다.
[카니발은] 마치 지배적인 진리들과 현존하는 제도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모든 계층질서적 관계, 특권, 규범, 금지의 일시적 파기를 축하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시간성의 축제이며, 생성과 변화 갱생의 축제인 것이다. 카니발은 모든 종류의 영구화, 완성, 그리고 완결성과도 적대적이다. 카니발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10)
이처럼 카니발에서는 - 계급과 지위와 나이와 소유 등에 따른 - 모든 위계질서가 파기되고 모든 가치가 전도된다. 또한 모든 법과 금지와 제한이 지양된다. 거기서는 최고의 지상의 힘들과 진리 및 신성까지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부정성은 전면적이고도 근원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성은 놀이로서의 카니발에서 모든 기존의 것들의 즐거운 상대화로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부정성은 바로 카니발의 근원적인 두 계기인 죽음과 탄생에서 죽음의 계기에 상응하며 그러기에 단순한 부정이 아닌 탄생의 계기를 내재하고 있는 부정성이다.
2.2. 카니발의 육체성과 그로테스크
죽음과 탄생을 축하하는 카니발은 무엇보다도 그 수태와 출산의 장소로서, 식사와 배설의 장소로서, 탄생과 성장과 노쇠의 장소로서 육체성과의 연관성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그리고 수태와 출산의 행위와 식사와 배설의 행위를 통하여 외설성과 세속화와 연관된다. 즉 카니발은 격하와 외설화와 세속화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 장소는 바로 육체이다. 카니발적인 대화의 장소는, 즉 카니발의 말은 무엇보다도 육체인 셈이다. 이러한 육체의 개념은 고전적인 고대 문화와 조형예술의 규범들과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흐친은 라블레의 작품에 나타나는 육체성과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 및 성생활을 단순한 중세의 금욕생활에 대한 육체의 복권으로 보는 이성 중심주의적인 근대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이것을 그러한 근대적 문화 개념과는 구별되는 민중적인 웃음 문화의 유산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바흐친은 이것을 “독특한 미학적 개념”으로 보고 잠정적이고 조건부로 “그로테스크 사실주의”*11)라고 명명한다.
바흐친은 이러한 그로테스크 사실주의를 “사실주의의 새로운 개념”으로 설정하며 거기에 비하여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의 퇴화와 붕괴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실주의를 “퇴화하는 사실주의”**12)라고 규정한다. ‘퇴화하는 사실주의’에서는 양가치적인 죽음과 탄생이라는 삶의 생성의 과정 중 긍정의 계기인 탄생이라는 젊은 고리가 상실되어 있다. 그리하여 순수한 시체만이, 임신을 할 수 없는 자기 동일적인 고립된 노인만이 남게 된다. 생성 속에서 젊은 고리와 화합될 그 총체성으로부터 단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주의가 드러내는 불임의 이미지들이 생겨난다. 그런 유형들은 단지 탄생하는 삶의 죽어가는 일부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주의는 모든 개체를 궁극적인 총체성과의 관계 외부에서 종결시키게 되며 그리하여 그 총체성은 과거의 이미지를 이미 상실하였으면서도 새로운 이미지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사실주의의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의 본질은 모든 육체와 사물들 사이의 경계를 다르게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테스크 사실주의는 자신의 이미지들 속에서 존재 자체의 생성과 성장, 영원한 미완성과 미완료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로테스크는 자신의 이미지들 속에 생성의 양극, 사라지는 것과 새로운 것, 죽어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을, 즉 두 개의 육체를 하나의 몸속에,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생명의 세포분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에서는 그 죽음이 두 개의 세포로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단세포의 세포분열처럼 결코 시체가 남지 않는다.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의 주도적인 특징은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상적으로 추상적인 모든 것을 물질, 육체적 차원으로, 불가분의 통일체인 대지와 육체의 차원으로 이행시키는 것”***13)이다. 카니발적인 모든 것, 패러디, 저속화, 육화는 모두 격하시키고 물질화하는 것이다. 격하는 “하부”와 관련되고 이것에는 다시 “상부”가 대응된다. 상부가 정신에 관여하는 얼굴과 머리라면 하부는 배, 생식기, 배설 기관, 엉덩이를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단순한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이 상부와 하부는 다시 천상과 대지와 대응된다.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의 장소인 카니발적인 육체는 바로 이러한 우주적 양상을 띤다.
따라서 격하는 육체의 저속한 부분의 생활, 배와 생식기관의 생활, 즉 성교와 수태, 임신과 출산, 포식과 배설 같은 행위에 관여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격하는 대지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흡수이자 탄생의 원리인 대지에 관여하는 것이다. 격하되면서 매장되고 동시에 씨를 뿌리며 보다 훌륭하게 탄생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다. 격하는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새로운 무덤을 파는 것이다. 격하는 파괴적이며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이며 재생적인 의미를 지닌다. 격하는 무로의 절멸이 아니라 수태하고 성장하고 생성하는 하부로의 하강이다. 그로테스크 사실주의의 하부란 태어나는 대지이며 육체적인 자궁이며 다시 시작하는 곳이다. 이러한 우주적 관계가 그 가장 전형적인 장소로서의 육체를 통해서 물질화한 것이 바로 그로테스크한 사실주의다. 죽음과 탄생과 천상과 대지라는 우주적 질서가 그와 관련된 수태와 출산, 생식기와 배설기관, 식사와 배설과 만나면서 육체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들은 이러한 우주적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된다. 이러한 이중성의 형식화가 바로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나타난다.
근대적인 규범에서의 몸은 자족적이며 닫힌 단일한 몸이다. 죽음은 그저 죽음일 뿐이지 결코 탄생과 합치되지 않으며 늙음은 젊음과 분리된다. 하지만 카니발적인 그로테스크한 몸에서는 총체성 속에서의 죽음은 어떠한 본질적인 것도 종결시키지 못한다. 죽음은 조상 전래의 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 속에서 그 몸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는 부활하고 갱신하기 위해서 파괴된다. 세계는 죽으면서 탄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상대성은 항상 즐거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테스크는 항상 변화의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다.”****14)
그로테스크 이미지의 근본에는 전체적인 몸과 그 경계들에 대한 특수한 개념이 놓여 있다. 그로테스크에서 몸과 세계 사이의 경계와 개별적인 몸들 사이의 경계는 고전주의나 자연주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그로테스크한 몸의 상황은 항상 두 몸의 교차점, 즉 한 몸과 다른 몸의 경계선 위에서 전개된다. 이 경계의 논리는 바흐친의 전체 사상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즉 말과 주체가 그 경계에서 대화하고 상호작용 하듯이 육체도 그 경계에서 대화하고 상호작용을 한다. 한 몸은 자신의 죽음을 내어주고 다른 몸은 탄생한다. 그리고 이 둘은 합쳐져서 두 개의 몸을 가진 하나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로테스크한 몸의 삶에서 기본적인 것은 그러한 육체적 드라마의 행위이다.
2.3. 카니발의 양가치성 - 죽음과 탄생
카니발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탄생이라는 우주적 원리에 지배되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죽음이면서 동시에 탄생을 내포하며 탄생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내포한다. 즉 하나는 다른 하나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두 가지의 시각을 가지며 양가치적이다. 모든 부정성은 동시에 긍정을 내포한다. 그리고 카니발의 이러한 양가치성은 무엇보다 미래를 향해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개별적인 몸을 기록하는 죽음의 이미지는 탄생하는 또 다른 몸의 귀퉁이를 보여준다. 이 다른 미래의 몸은 보이지도 않고 직접적인 이름도 없지만 죽음의 이미지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지옥의 이미지 역시 부정된 것과 심판 받은 것,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 낡고 불필요한 것을 담고 있으나 동시에 새로운 삶, 새로 태어나는 미래의 귀퉁이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과거의 낡은 것을 심판하고 없애주는 주체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카니발이 죽음과 부정성을 시공간화하고 있으나 그 속에 탄생과 부활과 미래를 향해 있다는 것, 우주적 질서를 배경으로 모든 과거적인 것들의 죽음 속에서 탄생과 부활을 예감하고 축하한다는 것이 카니발을 즐거운 것이 되게, 진정하고 전면적인 축제가 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카니발적인 웃음의 원천이 된다.
이러한 양가치성은 육체뿐만 아니라 말에서 구체화된다. 양가치성이 육체에 구현된 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로테스크라면 말에 나타난 것이 바로 양가치적인 말이며 카니발적인 풍자이다. 육체든 말이든 여기서는 두 가지가, 상부와 하부가, 죽음과 탄생이 하나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가치적인 것들은 근원적으로 미래와 탄생을 지향하므로 유쾌한 것이 된다. 바흐친에 따르면 라블레의 작품에는 중립적인 말이 없다. 오직 칭찬과 욕설의 혼합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체적인 그리고 유쾌한 카니발적인 시간성, 탄생을 예감하는 미래를 향한 변화와 생성의 시간 자체의 칭찬이며 욕설이다. 전체의 관점은 조금도 중립적인 데가 없으며 그것은 생성하는 세계에서는 제 3자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체는 칭찬하면서 동시에 욕을 한다. 칭찬과 욕설은 사적인 목소리에서는 구분되고 분리되지만 전체의 목소리 속에서는 양면가치적인 단일체로 합쳐진다. 바흐친에 따르면 이러한 칭찬-욕설의 혼합이 카니발적인 말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에 속한다. 패러디 역시 카니발적인 말의 형태이며 카니발적인 패러디는 단순한 부정의 패러디와는 다르게 부정하면서 동시에 부활시키고 새롭게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탄생을 축하하는 유쾌한 형태로 제시된다.
카니발 이론에서 여성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카니발적 전통은 여성에 대해서 조금도 적대적이지 않으며 여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카니발적인 전통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하부와 관련이 되어 있다. 여성은 이러한 하부가 인격화한 존재이며 낮아짐과 동시에 부활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여성은 하부처럼 양가치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거기서 여성은 낮아지고 세속화되고 육화되어 자신을 죽인다. 하지만 여성은 출생의 근원이며 자궁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카니발적 전통 속의 여성 이미지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거기서 여성은 감성적이고 음탕하며 거짓말을 잘하고 형이하학적이며 비열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들은 구체화와 비하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삶을 혁신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은 자신의 상대역들인 남자들과 대조된다. 이러한 “여성 이미지는 모든 추상적인 요구와 제약받고 완료된 것들, 쇠진한 것, 기존의 것들을 향한 일종의 욕설이다. 독특하게 구현되고 인격화된, 외설적인 욕설인 것이다. 이것은 낡은 것과 종결된 것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마르지 않는 수태관이다.”*****15) 그리고 여성의 창자는 무한하고 탐욕스러워서 본능적으로 여성은 모든 낡은 것들에 대해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즉 여성은 근원적으로 새로운 것을 낳는 시원이다. 여성은 천성적으로 영원성에 대해 적대적이며 영원성이란 거만한 늙은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특히 영원함을 약속하는 반지는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며 그것은 수태와 혁신의 끝없는 흐름으로 이해된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아내의 역할이 바로 여성의 양가치적 본질이다. 늙은 아버지는 변화와 혁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여기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공포는 아내의 바람기에 대한 공포, 운명에 대한 공포로 나타난다. 카니발에서 운명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며 이 운명은 낡은 것을 죽이고 새로움과 젊음을 낳는 여성의 이미지에 의해서 구현된다.
3. 민중과 웃음
3.1. 카니발의 민중성과 비공식적인 말
카니발의 주체는 민중이다. 이것은 메타언어학의 주체가 구체적 개인인 것과 대응된다. 그와는 달리 카니발은 관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카니발의 주체는 민중 전체가 된다. 메타언어학에서 말의 주체로서 구체적 개인을 설정하였으며 그 가치평가적 대화를 통해서 분절과 형식화를 이루었듯이 카니발의 주체로서 민중을 설정하는 것은 바흐친이 주체중심주의를 상위 심급에서도 관철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민중의 경우는 개별적 분절을 통해서 부정성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성을 통해서 전면적인 부정과 동시에 전면적인 긍정을 확보한다. 다른 한편으로 민중성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자로서의 이데올로기적인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을 암시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바흐친에게서의 민중성의 개념은 그 보편성으로 해서, 그리고 그 전면적인 부정성과 열림으로 해서 변증법과 유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마르크스주의에서의 민중개념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다. 또한 메타언어학에서는 주체를 작가와 인물과 독자로 구분하고 이들 사이의 가치평가적 대결의 결과를 형식화한 것이 텍스트로 나타난다. 하지만 카니발에서는 이 민중적 주체는 작가와 인물과 독자가 하나로 된다. 대신 카니발의 민중은 그 전체성을 통해서 작가와 배우와 관객의 구분이 없으나 모든 참여자의 전면적인 부정과 동시에 전면적인 긍정의 형태로 그 분절을 드러낸다.
이처럼 카니발은 민중, 그것도 개별 민중이 아닌 전체로서의 민중과 민중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전민중성은 카니발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16) 바흐친은 이러한 민중을 부르주아적이고 에고이스트적인 근대적인 개인이나 생물학적인 개체와 대립시킨다. 카니발 속의 민중은 자신의 발전 속에서 영구히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그러한 민중인 것이다. 그들은 민중적이고 집단적인,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종족적 육체와 연관을 맺고 있다. 카니발의 민중은 오랜 전통 속에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민중성으로 해서 모든 육체적인 것은 그처럼 장대하고 과장되고 정도를 넘을 수가 있으며 그러한 과장이 긍정적일 수가 있다. 카니발에서의 물질과 육체의 이미지들에서 주요한 것은 풍요와 정도를 넘는 과잉이다. 바흐친은 이 풍요로움과 전민중성이 유쾌하고 축제적인 카니발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바흐친은 괴테의 ꡔ이탈리아 여행기ꡕ에 나오는 로마의 카니발에 대한 기록과 관련하여 민중을 정의하고 있다. 첫째로 민중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다. “로마의 사육제(카니발)는 본래 국민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마련한 축제이다.”**17) 민중은 아무것도 받지 않고 아무에게도 고마워하지 않고 자신을 주인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카니발에서는 손님이나 구경꾼은 없으며 모두가 참여자이고 모두가 주인이다. 둘째로 카니발의 참여자인 민중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축제의 시작과 함께 그들은 모든 진지함을 잊어버린다. 그리하여 “카니발의 참석자인 민중은 불빛으로 가득 찬 땅의 가장 유쾌한 주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이란 새 생명의 탄생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고, 생성과 시간의 유쾌한 이미지를 알며 이러한 ‘죽음과 생성’을 완전한 형태로 영유하기 때문이다.”***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개별적 주관적으로 이것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집단적 영원함, 지상에서의 역사적 불멸, 끊임없는 혁신과 성장을 느끼는 민중의 감각에 객관적으로 참여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카니발은 민중이 배우나 관객 없이도 자신의 부활과 갱생을 연기하는 독특한 놀이의 이미지에 의해서 형식화된 삶 자체가 된다.
카니발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한 육체는 그러므로 바로 민중의 육체이다. 먹고 먹히고 애를 배고 아이를 낳고 하는, 그로테스크하게 제시되는 모든 육체는 영원히 소생하는 민중의 육체를 비춰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광장과 시장이 이러한 민중적 삶의 장소로 나타난다. 민중의 장소인 시장과 광장은 카니발이 열리지 않는 때라도 언제나 카니발적이다. 광장과 시장에는 장사꾼들의 호객과 욕설, 솔직함과 친근함과 같은 분위기가 독특한 광장의 언어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광장에서는 자유롭고 유쾌한 놀이의 독특한 광장적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거기에서는 고상한 것이나 비천한 것, 성스러운 것이나 저속한 것이 동일한 권리를 가지며 동등하게 된다. 예를 들어 광장에서의 호객 행위는 위계와 관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민중들의 이러한 말은 따라서 항상 아이러니한 것이며 다양한 차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웃고 있는 것이다.
카니발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엄숙하고 공식적인 세계와 이와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의식적 구경거리의 형식인 카니발에서 나타나는, 교회와 국가 밖의 비공식적인 세계를 구분한다. 바흐친은 비공식적인 세계를 제 2의 세계라고 부르고 그러한 삶을 제 2의 삶이라고 규정한다. 바흐친은 민중의 삶의 그러한 이원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중세와 르네상스는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카니발에서 민중의 제 2의 삶과 제 2의 세계는 마치 뒤집어진 세계처럼 일상적인 제 1의 공식적인 세계, 즉 카니발 외적인 생활에 대해서 패러디처럼 설정된다.****19) 중세의 사람들은 이처럼 두 개의 삶을 살았다. 하나는 “공식적”인 삶으로 엄격하고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전적으로 진지하고 음울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카니발적-공적인”*****20) 삶으로 자유롭고 신성모독과 모든 성스러운 것의 세속화, 왕의 폐위와 외설스러움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친밀함으로 가득 찬 그러한 삶이다. 이 두 개의 삶은 모두 정당화되었지만 시간적인 한계를 통해서 엄격히 분리되었다.
카니발에서 말해지는 것은 바로 비공식적인 말이다. 이 기간에는 유럽의 민중들의 언어적 삶은 카니발화되었으며 그들의 “친밀한 공적인”*21) 언어는 카니발적인 세계이해에 의해 깊이 침윤되었다. 거기에 대하여 공식적인 삶과 공식적인 세계의 품위 있는 어법의 규범은 임신과 수태, 출산과 신체 내부의 생리현상과 관련된 말을 금한다. 그리하여 공식적인 말과 비공식적이며 친밀하고 거리낌 없는 말 사이에는 확연한 경계선이 생기게 된다. 공식적인 말에 대해서 카니발적인 비공식적인 말, 즉 민중적이고 축제적인 광장의 말은 완전히 다르게 말한다. 카니발적-대중적인 말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자연스런 힘은 신앙, 사상, 이념, 성인들, 거짓된 경건함, 죽음에 대한 공포, 종말론과 예언들로 이루어진 중세의 제도와 중세적 세계관의 권위를 박탈하고 쇄신하고 있다. 이러한 말은 기존의 모든 완성된 것들, 부동성과 영원성에 대한 모든 요구들, 즉 공식적 세계를 지속시키려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적대적이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역동적이고 가변적이며 유희적이며 불안정한 형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카니발의 비공식적인 말의 모든 형식은 변화와 갱신의 격정에 대해서 그리고 지배적인 진리와 권위에 대해서 유쾌한 상대성의 의식에 젖어 있다.
3.2. 카니발적 웃음
바흐친은 라블레에 대한 저작에서 첫 장을 <라블레와 웃음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웃음이 카니발에서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은 카니발적인 라블레의 문학을 그로테스크 사실주의라고 규정하였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죽음과 탄생, 즉 생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생성하는 것은 아직 미완성적이고 미완성적인 것은 우습다. 다시 말하면 죽음과 탄생과 미완의 생성을 놀이하는, 시간 속의 삶이 가지는 근원적인 양가치적인 존재를 하나의 육체 속에 형식화시키고 있는 카니발적 그로테스크는 그 근본에 있어서 웃음의 미학을 내포한다. 그래서 카니발적인 웃음은 죽음까지도 웃을 수가 있다.
그리하여 카니발의 웃음은 단순한 부정적 풍자의 조롱하는 웃음과는 구별된다. 카니발적인 웃음은 오히려 인간의 존재와 삶 자체 속에, 그 근원에 내재하는 것이다. 바흐친은 15세기에 “바보제 festa stultorum”와 관련하여 우스꽝스러움과 웃음이 “인간의 제 2의 본성”**22)이라고 언급된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개념인 카니발적인 2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 바흐친은 바보제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적 조소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부활과 갱생의 희열에 가득 찬 웃음 속 깊숙이 가라앉아 있으며, 웃고 있는 것은 인간의 제 2의 본성, 즉 공식적인 세계관과 제의 속에서 표현되지 못했던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하부라고 본다.***23)
그러한 하부적인 웃음은 축제의 웃음이다. 카니발의 웃음은 그러므로 어떤 개별적인 우스꽝스러운 현상에 대한 개인적인 반작용이 아니다. 바흐친의 이론에서 카니발적 웃음은 다음과 같은 특징과 다양한 측면을 갖는다:
1) 전민중적 2) 보편적 3) 양가치적 4) 자기비판 5) 유토피아적 6) 공포로부터의 자유 7) 세계관적 8) 존재의 유쾌한 상대성 9) 삶의 기쁨.”****24) 그것은 죽음에서 예감되는 탄생에의 즐거움이다.
바흐친은 <라블레와 웃음의 역사>의 장의 말미에 웃음의 퇴화의 역사를 기록한다. 바흐친에 따르면 16세기에 웃음은 정상에 이르고, 이 정상의 정점에 라블레의 소설이 놓여 있다. 이후 17세기에서는 절대군주제의 권위주의적 엄숙함 하에서 그로테스크의 이중적 가치는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되지만 웃음들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하부 장르나 비정전적인 장르 속에 삶을 지속하게 된다. 바흐친에 따르면 카니발적 형식, 모티브 및 상징들이 18세기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지만 민중 축제적 웃음의 해체 과정은 18세기에 들어와 본질적으로 종료되었다. 동시에 19세기에 주류를 이루게 될 풍자 오락과 같은 웃음의 새로운 장르들의 형성도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바흐친은 카니발적인 웃음의 전통이 소멸해간 기간인 지난 4세기 이전에는 지난 4세기 동안 지배적이 된 그러한 사유를 알지 못하였다고 보고 있다.
3.3. 카니발 왕의 죽음과 축제의 의미
이러한 카니발적 세계경험, 카니발적 양가치, 카니발적 격하와 같은 카니발적인 모든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카니발의 놀이는 바로 어릿광대를 왕으로 대관시키고 뒤이어 폐위시키는 놀이이다. 이러한 일시적인 왕과 왕비의 대관과 폐위의 관습은 카니발적인 유형의 모든 축제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규모에 따라서 바보 신부, 바보 주교, 바보 교황이 선출되기도 한다. 바흐친은 이러한 왕의 대관과 폐위의 의식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카니발적인 세계감정의 핵심인 “교체와 변화의, 죽음과 쇄신의 열정”*****25)으로 본다. 카니발은 모든 것을 무화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쇄신하는 전면적인 축제이며, 추상적인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세계감정이기 때문에 이처럼 구체적이고 구상적인 의식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대관과 폐위는 한편으로는 변화와 쇄신의 불가피성과 생산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구조와 질서, 모든 세력과 이념과 위계적 지위의 유쾌한 상대성을 가장 도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양가치적인 풍습인 대관에는 이미 앞으로의 폐위가 내재해 있다. 즉 대관은 처음부터 양가치적이다. 왜냐하면 카니발의 왕으로는 실제의 왕과 대척점에 서 있는 노예나 바보가 선출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카니발적인 전도된 세계가 제시되면서 동시에 성화된다. 그리고 왕이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 권위의 상징, 의복들은 양가치적이며 그 실제적 의미가 아닌 오직 즐거운 상대성의 흔적이 된다. 처음부터 그리고 대관식 내내 폐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상징들은 부정의 전망을 내포하거나 아니면 그 역이 된다. 즉 탄생이 죽음을 숨기고 있으며 죽음이 새로운 생성을 감추고 있다.
폐위된 왕을 때리고 조소하고 욕을 하는 폐위의 의식으로 대관으로 시작된 놀이는 종결된다. 그런 점에서 폐위는 대관과 분리가 불가능하다. 즉 폐위 의식을 치르는 동안 새로운 대관이 예견된다. 폐위는 절대적인 부정이 아니며 긍정적인 면을 내포하는데 그것은 바로 폐위의 의식 속에서 변화와 쇄신의 카니발적인 열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니발은 변화 자체, 대체 가능성의 과정 자체를 축하하는 것이지 대체되는 것, 대체되어 새로이 지배적이 되는 그러한 것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카니발은 기능적이지 결코 실체적이 아니다. 카니발은 아무것도 절대화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존재하는 것의 유쾌한 상대성을 공표할 뿐이다. 이러한 대관과 폐위는 모든 카니발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며 낡은 권력, 죽어가는 권력에 관한 진실로 이해된다.
카니발은 근본적으로 부정성을 내포하며 모든 권위를 상대화시키고 쇄신을 축하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카니발적 시간의 내부에 제한된 일시적인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민중들은 일년 동안에 비록 상당 기간을 카니발적 해방의 시간을 보냈지만 대부분의 시간들은 공식적이고 엄숙한 세계의 지배 하에서 보내었다. 그렇다면 카니발은 단순히 당시의 지배층이 의도적으로 허락한, 지배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안전핀에 불과하였는가. 왕의 대관과 폐위의 놀이는 그저 의도적으로 허락된, 즉 중단시킬 수도 있었던 감옥 속의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하지만 바흐친은 르네상스가 중세의 공식 문화와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민중의 위대한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함으로써 그러한 우려를 일축하고 카니발에 보다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르네상스는 인문주의의 고대를 밝히기 위해서 천년에 걸친 중세의 사유로부터 자신의 의식을 해방시켜야 했고, 공식문화에 대한 반대의 진지를 점령해야 했으며 수세기에 걸친 발전궤도로부터 이탈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민중문화라는 것이다. 카니발은 오랜 세월 동안 공식적인 세계관의 지배로부터 의식을 해방시켰으며 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하였다. “두려워하지 않고, 경건함 없이, 완전히 비판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게다가 긍정적으로. 왜냐하면 카니발은 풍부하고 물질적인 세계의 시원과 형성, 변형, 그리고 새롭고 불멸하는 민중의 억누를 수 없는 힘과 승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26) 거기에는 “모든 존재가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혁신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불가피성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카니발적인 민중 문화는 그것을 준비하였다. 바흐친은 “오직 민중 문화만이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27)
4. 카니발적 문학
4.1. 문학의 카니발화
이러한 카니발은 인간의 근원적인 사고와 초기사회에 그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중세와 르네상스에 이르는 계급사회 속에서도 공식적인 문화에 대립되어 있는 민중적인 카니발 문화는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 그러면서 카니발은 그러한 발전의 매 시대마다 전체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문학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카니발은 물론 문학적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카니발은 “상징적, 구체적-감각적인 온갖 언어***28)”를 만들어 내고 거창하고 복잡한 공연과 카니발적인 몸짓들을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 거기에 관류하고 있는 카니발적인 세계이해를 표현하였다. 또한 이러한 카니발적인 세계이해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카니발적인 삶을 살았던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체험된 사상들이며 그 때문에 문학과 문학의 장르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처럼 카니발과 카니발적 세계경험을 문학 속으로 전이시키는 것을 바흐친은 “문학의 카니발화 Karnevalisierimng der Literatur”****29)라고 부른다.
바흐친에 따르면 문학의 카니발화는 서사시, 비극 및 고전적 수사학과 같은 진지한 장르가 아닌 “진지하며 희극적인 것의 영역 Bereich des Ernsthaft-Komischen”에서 나타난다.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카니발적인 민속문화 karnevalistische Folklore”*****30)와 결부되어 있으며 모두가 카니발적인 세계이해의 결정적인 영향 하에 있다. 바흐친은 이러한 문학에서는 카니발적인 세계이해가 그 근본적인 특성들을 결정하고 인물들과 언어에 현실에 대한 특수한 관계를 중재한다고 본다. 그러한 장르들이 비록 강력한 수사학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카니발적인 세계이해에 고유한 “즐거운 상대성의 분위기”*31) 속에서 그 일면성과 합리적 내용 및 도그마는 약화된다.
카니발적인 세계이해는 바흐친에 따르면 강력하고 생기를 불어넣고 변형시키는 힘이며 끊임없이 넘쳐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진지하며 희극적인 것과 아주 조금이라도 결부가 되어 있다면 지금도 “카니발적인 효모”**32)를 포함하고 있는 셈이 되어 다른 장르와는 분명히 구별이 된다. 그러한 장르는 우리가 알아 볼 수 있는 각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좋은 귀는 거기에서 울리는 카니발적인 세계이해의 아주 미세한 반향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 카니발적인 민속문화의 영향 하에 있는 그러한 문학이 바로 “카니발화된 문학 karnevalisierte Literatur”***33)이다. 그는 진지하며 희극적인 것의 전체 영역을 카니발화된 문학의 최초의 예로 본다. 바흐친은 이러한 문학의 카니발화가 “역사시학 historische Poetik” 과 “장르정치학 Gattungspolitik”이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34)
바흐친은 진지하며 희극적인 장르에서 확인되는 카니발화된 문학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본다: 1) 모든 것이 생동감 넘치고, 거리가 없으며, 종종 현장성 있게 현재화된다. 거기서는 신화나 과거의 역사적 인물들까지 현재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과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접촉 하에서 현재화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재화는 현실의 이해와 판단과 표현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제시된다 2) 문학적 형상의 자유로운 창안과 전승된 것에 대한 비판적 태도 3) 양식과 목소리의 의도적인 다양성.*****35)
4.2. 카니발화된 문학: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적 풍자
바흐친에 따르면 카니발적인 것은 문학의 발전에서 “가장 지속적이며 영원한 경향들”*36)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카니발적인 것은 태고적인 것이면서도 오래 살아남는 그런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대적인 것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쇄신의 덕분이며, 그것은 각 시대마다 개별 작품에서 다시 새로워진다. 때문에 고대적인 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항상 살아 있으며 반대로 현재 속에 살아 있으면서도 과거와 그 근원을 회상한다. 그것은 문학의 발전에서의 “창조적 기억 schöpferisches Gedächtnis”을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발전의 “통일성과 계속성”을 보장할 수 있다.**37)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여전히 살아 있는 “카니발화된 문학”의 특성들을 역사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형식들 속에서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후의 것이 그것의 쇄신인 그러한 구체적 형식의 태고적 형식을 확인하려 하며 그 창조적 기억을 거꾸로 추적한다. 그리하여 바흐친은 카니발화된 문학의 최초의 예라고 할 수가 있는 진지하며 희극적인 장르들 중에서 그것을 발견하는데 그 중에서 “소크라테스적 대화 sokratischer Dialog”와 “메니페적 풍자 menippeische Satire”***38)를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본다. 바흐친은 이 두 장르의 특징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카니발화된 문학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의 규명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규준과 도구들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바흐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적 대화는 그 당시에는 널리 퍼져 있었던 장르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적 대화를 집필하였다. 바흐친은 소크라테스적 대화는 결코 수사학적인 장르가 아니며 민속적이고 카니발적인 토대 위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카니발적인 세계경험에 깊이 관통되어 있으며 그 발전과정 중 구전의 단계에서 특히 그러하다고 본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소크라테스적 대화라는 장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이르는 유럽의 산문소설의 발전 과정에서 그 출발점들 중의 하나로 고려된다.****39)
소크라테스적 대화의 장르는 그러나 곧 해체되고 다른 대화적 장르인 “메니페적 풍자”가 나타난다. 바흐친에 따르면 이 장르는 직접적으로 카니발적인 민속문화로 소급되고 전자보다 카니발의 영향이 훨씬 더 컸다. 이 장르는 초기 기독교 문학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의 시대인 르네상스, 종교개혁 및 근대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오늘날도 여전히 발전 중인 이 장르는 유럽 문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메니페적 풍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문학에서 카니발적인 세계경험의 중요한 담지자이며 중요한 중재자가 되었다. 메니페적 풍자는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비교하여 웃음의 요소의 비중이 더 크며 플롯과 이념에 있어서 특별한 자유를 구가할 뿐만 아니라 대담하고 거리낌 없는 상상력을 통해서 형상화된 이념과 진리의 세계 속으로의 모험이 그 내용을 이룬다.*****40)
4.3.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성적 소설
바흐친은 카니발화된 문학의 고대적 형식들인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의 풍자의 특징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도 전적으로 적용된다고 본다. 특히 메니페적 풍자의 고전적 특징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후기의 소설에서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계기를 이룬다. 근본적으로 두 장르의 모든 특징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약간 수정되고 복잡해진 상태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실제로 이들 세계는 같은 것이며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적 풍자가 시작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경우는 그 정점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이 세 계기, 즉 카니발과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적 풍자를 확인했다고 결론짓는다.*41) 즉 카니발화된 문학의 통시적 역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공시적으로 만난다. 카니발화된 문학의 고대적 형식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서 쇄신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흐친에 따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카니발적인 이미지의 구조적인 특징이자 창작의 원리는 첫째로 탄생과 죽음, 비극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과 같은 생성을 이루는 두 개의 축인 대립적인 두 항을 하나로 통합하고, 서로 마주보게 하고, 서로를 반영하고 서로를 알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모든 것이 반대되는 것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증오는 사랑과 경계를 맞대고 있고 믿음은 무신론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셋째로 모든 것이 서로에 대해서 알고 서로 연관이 있고 같이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반영하고 서로 대화하면서 밝혀주기 때문에, 모든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것, 분리된 것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며 따라서 “카니발적인 자유와 카니발적-예술적인 시공간 개념”**42)이 필요하게 된다. 넷째로 카니발화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에서 우주적인 큰 대화의 열린 구조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사회적인 협력이 이제까지 일면적이며 모노로그적이었던 정신과 의식의 영역 속으로 전이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카니발적인 세계이해는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윤리적-인식론적인 유아론을 극복하도록 돕는다.***43) 즉 인간은 그의 정신적 삶의 가장 깊고 친밀한 영역에서조차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가 없으며 타자의 의식 없이는 꾸려나갈 수가 없다. 다섯째로 카니발화는 특정 시대의 사적 생활에서 오는 협소한 장면을 신비극에서 볼 수 있는 우주적인 보편적 인간적인 장면으로 확대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다른 사람, 다른 의식과의 모든 결정적인 만남은 그러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무한 속에서와 위기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니발화된 문학의 옛 형식들을 이용하였으나 “진정한 다성구조의 창시자”****44)가 됨으로써 독창적이다. 바흐친은 고대의 카니발화된 문학인 소크라테스적 대화나 메니페적 풍자 및 라블레는 결코 다성구조를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셰익스피어에서 발작과 위고와 톨스토이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작가도 다성구조를 알지 못하였다고 단언한다.*****45) 비록 다성구조 자체가 바로 이러한 유럽문학의 발전계열을 통해서 준비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바흐친은 소크라테스적 대화와 메니페적 풍자에 의해서 시작된 이러한 카니발화된 문학의 전통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다시 되살아나 다성적 소설이라는 다시없이 독창적인 새로운 형식으로 쇄신되었다고 주장한다.
5. 맺는 말
카니발 개념은 바흐친의 언어 이론인 메타언어학과 함께 그의 이론 체계에서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대화 이론과 메타언어학을 위해서도 본질적인 요소이다. 메타언어학에서 말이 작은 대화의 장소고 텍스트가 큰 대화의 장소라면 카니발은 거대한 우주적 대화로서 앞의 두 대화에 세계관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다른 두 대화를 그 근원에서 무한히 열어 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적이며 양가치적이며 민중적인 카니발은 그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서 문학을 카니발화하고 그 카니발화된 문학의 오랜 전통은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 쇄신되어 부활한다. 메타언어학과 카니발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만나서 이루는 것, 즉 우주적으로 열린 메타언어학이 바로 다성구조이다.
바흐친의 이론은 카니발 개념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 계기의 하나인 복수성과 해체의 개념에 상응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카니발의 이론이 없었다면 바흐친의 다성구조 이론은 그 대화성에도 불구하고 해체의 계기의 필연성을 드러내는 데는 미흡하였을 것이다. 다성구조는 카니발로 해서 비로소 시공간적으로 절대적으로 열려진다. 이것이 바흐친이 그의 다성적 소설의 이론인 ꡔ도스토예프스키의 시학의 문제점들ꡕ에 카니발 이론을 추가한 이유이다.
바흐친이 새로이 해석한 카니발 개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되고 적용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죽음과 부활의 양가치성이 만들어내는 우주적으로 끝없이 열린 갱생의 축제라는 의미가 상실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직 거기서 만이 카니발적인 자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미하일 바흐친: ꡔ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ꡕ, 이덕형, 최건영 공역, 아카넷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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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sammenfassung
Zur Karnevaltheorie Bachtins und der Karnevalisierung der Literatur
Park, Gun-yong(Dongeui Univ.)
In diesem Beitrag wird Michail Bachtins Karnevaltheorie untersucht werden, die mit der Metalinguistik und der Chronotopustheorie zusammen den Kern seines theoretischen Gebäudes bildet. Dabei soll zuerst der Karneval-Begriff definiert und dann die Karnevalisierung der Literatur als Transposition des krnavalistischen Weltempfindens in die Literatur erklärt werden.
Karneval ist schon früh eins seiner Hauptthemen gewesen, und die Darstellung der Beziehung des Dostoevskijschen Werkes zur Tradition des Karneval soll bereits Bestandteil der ursprünglichen Fassung gewesen sein. Das sog. Karneval-Buch wurde jedoch erst rund dreißig Jahre nach dem ersten Schreiben veröffentlicht, und der Karneval wurde wie im ersten Plan der zweiten Fassung des Dostoevskij-Buch(1963) hinzugefügt.
Der Karneval ist ein wesentliches Kulturphänomen und ein spezifisches Weltempfinden. Er ist universal, und ist vor allem durch das unendliche Werden, die Ambivalenz von Tod und Geburt gekennzeichnet. Also hat das karnevalistische Weltempfinden eine totale Negativität, zugleich antizipiert es eine totale, neue Geburt. Dieses Double in einem Körper erweist sich gerade als grotesk und ruft das Lachen hervor. Der Karneval ist volkstümlich. Das Volk als das Ganze lebt während des Karneval das zweite, inoffizielle Leben und empfindet dadurch die Freiheit von allen Mächten and Gedanken.
Das karnevalistische Weltempfinden hat in allen Phasen der Geschichte die gesamte Kultur durchdrungen und hat als konkret-sinnliche Gedanken vor allem auf die Literatur einen starken Einfluss ausgeübt. Vor allem die ernsthaft-komischen Gattungen wie “sokratischer Dialog” und “menippeische Satire” können als archaische und ausschlaggebende, kanivalisierte Literatur angeführt werden. Dostoevskijs originale, polyphonische Romane stehen am Ende dieser Entwicklung.
핵심어 Stichwörter
우주성 Universalität
양가치성 Ambivalenz
그로테스크 Groteske
민중성 Volkstümlichkeit
웃음문화 Lachkultur
<논문투고일: 2004.9.18. 논문심사일: 2004.10.26. 논문심사완료일: 2004.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