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추가(古鄒加) 고장(高臧)을 새로운 태왕으로…!
궁장령 요새를 지키고 있던 온사문(溫沙門)은 고죽리(高竹離)로부터 연개소문의 지시를 전해 듣고 곧바로 요동성(遼東城)으로 가서 성주인 대형(大兄) 고지순(高支純)에게 혁명에 가담할 것을 종용(慫慂)하였다. 고지순은 자신의 휘하 장수로서 경갑기병대(輕甲騎兵隊)를 이끌고 있는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의 무장(武將) 걸곤우(乞昆羽)·걸중상(乞仲象) 부자(父子)를 평양에 보내 연개소문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들은 박작성(泊灼城)에서 소부손(所夫孫)의 군대와 합세하여 압록수와 살수를 건너 평양을 향해 남진했다.
국내성(國內城)의 욕살(褥薩) 고량(高量)도 아들인 대형 고문(高文)으로 하여금 환도산성(桓都山城)의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도성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3만여명에 이르는 이들 혁명군이 압록수와 살수를 건너 도성에 이르도록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것은 영류태왕(榮留太王)이 이미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도성을 제외한 외평의 장수들 대부분이 영류태왕의 친당정책에 등을 돌렸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막 자정이 지난 한밤중에 두방루(豆方婁)와 태학박사(太學博士) 도수기(都壽技)를 데리고 대양왕(大陽王) 고우(高禹)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고장(高臧)의 집을 찾아갔다. 깊은 밤에 연개소문 일행을 맞은 고추가 고장은 당황했으나 이내 안정을 되찾고 이들을 밀실로 안내했다. 여종이 차를 내오고 물러가자 고추가 고장이 연개소문에게 물었다.
“연 장군, 그대가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찾아올 줄은 몰랐소. 갑자기 무슨 일이오?”
“사세가 급하니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바로잡고자 하오니 고추가 전하께서 다음 보위를 맡아주셔야겠습니다!”
“아니,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고추가 고장이 너무나 놀라 찻잔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당금 태왕이 국사를 크게 그르치고 있기에 소장이 참지 못해 일어서기로 했습니다. 건무가 열성조(列聖祖)께서 지켜온 천년제국의 기업을 들어 하루아침에 서토의 오랑캐 이세민에게 바치려드니 도저히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다음 보위를 맡아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어허! 이거야 원 참, 오밤중에 찾아와 갑자기 보위에 오르라니…… 이 몸이 태자도 아닌 일개 황족에 불과하거늘, 연 장군은 이 사람을 역적으로 만들 셈이오?”
“역적이라니,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국가와 백성을 돌보지 않는 임금은 이미 임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국가와 백성에게 해악이 되는 제왕을 신민(臣民)들이 바꿔치운 경우는 유사 이래로 여러 차례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고구려만 해도 태왕을 바꾼 경우가 이미 여러 번 있었지요. 그 일은 여기 태학박사가 아뢰올 것입니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도수기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고추가 전하, 그렇사옵니다! 연 장군의 말씀처럼 우리 고구려도 태왕을 갈아치운 경우가 세 차례나 있었지요. 첫번째는 제5대 모본왕(慕本王) 해우(解憂)를 근신(近臣) 두로(杜魯)가 시해하여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즉위한 일입니다.두번째는 제7대 차대왕(次大王) 수성(遂成)을 연나부(椽那部) 조의(早衣)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군사를 일으켜 죽이고 신대왕(新大王) 백고(伯固)를 옹립한 일입니다. 세번째는 제14대 봉상왕(烽上王) 상부(相夫)를 남부(南部)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가 제거하고 미천왕(美川王) 을불(乙弗)을 보위에 세운 일입니다. 전하, 이 세차례의 반정(反正)이 모두 임금이 덕을 잃고 폭정을 자행했기에 자처한 일이었사옵니다.”
“그렇습니다. 자고로 민심은 천심이라 했습니다! 민심을 잃은 임금은 하늘도 버린 임금입니다. 국인(國人)의 공분을 사는 임금은 이미 임금의 자격을 잃은 공적(公敵)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당금 태왕은 내게는 백부(伯父)가 되는데……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전하! 대의를 위하여 사소한 친족의 정은 과감히 버리셔야 합니다.”
“연 장군, 그럼 이, 이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오?”
“지금 곧 의관(衣冠)을 갖추고 소장을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아니, 이 밤중에? 도대체 어디로 가잔 말이오?”
“지금은 무엇보다도 전하의 안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사정이 급하니 빨리 채비를 차리시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씀도 마시고 바로 떠나셔야 합니다!”
고추가 고장이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연개소문과 두방루는 그를 호위하여 어두운 밤길을 내달렸다. 그리하여 동부가로 돌아와 후원의 깊은 별당에 고장을 모시고 가병들로 하여금 엄충히 경비토록 했다.
내사부 위장 해철주(解鐵周)가 연개소문의 집으로 찾아온 것은 그날 새벽 인시(人時) 무렵이었다. 연개소문은 해철주를 후원 별당으로 데리고 가면서 미리 일러주었다.
“고추가 고장을 다음 태왕으로 모시고자 하네. 자네와 미리 상의하지 못해서 미안하네만 양해해주게.”
“미안할 건 없네. 고장 전하라면 나도 괜찮은 인선(人選)이라고 생각하네. 뭐, 달리 마땅한 적임자도 없고 말일세.”
별당으로 들어가 고추가 고장을 보자 해철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엄숙하게 군례를 올렸다.
“내사부 위장 해철주가 태왕 폐하를 뵙습니다!”
막상 태왕 소리를 듣자 고장이 당황하여 의자에서 일어나며 마구 손을 내저었다.
“다, 당치도 않소! 태왕이라니, 아직까지는…”
연개소문이 자리를 정리했다.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세 사람은 탁자에 둘러앉아 밀담을 시작했다.
“해 장군이 반드시 해줘야 할 일이 있네!”
“무슨 일이든 분부만 내리시게.”
“자네는 이제부터 황궁 안의 일을 책임져야 하네. 이 길로 바로 입궁하여 태위군(太慰軍)을 장악하게. 하지만 거사에 대해서는 자네 심복인 차대웅(車大雄) 교위(校尉) 외에는 아무에게도 발설하면 안 되네. 혁명의 성패는 오로지 자네의 두 어깨에 달린 것이야! 혁명이 성공하면 자네가 일등공신이 되는 것일세.”
“잘 알겠네! 그럼 거병은 언제 할 작정인가?”
“오늘 중으로는 요동에서 군사들이 당도할 것이니 병력 배치를 모두 끝내고, 내일 패수 강변에서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거병할 예정일세!”
“자칫 잘못하면 내전(內戰)으로 번질 수도 있네!”
“그래서 열병식을 거행하려는 거야. 아예 한자리에서 끝장을 봐야지!”
“그렇다면 제거할 자들을 모두 그 자리에 불러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아침에 입궐하여 건무와 고웅백·도병리·고묘복·고승 등 매국노 간신들을 열병식에 모두 초청할 생각이라네. 그러니까 자네는 오늘 내가 입궁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잘 받쳐주기 바라네.”
“그건 염려 말게! 어전에 상주하러 들어올 때 주살하라는 명령은 없었으니까…”
해철주는 고추가 고장에게 군례를 올리고 급히 별당을 떠났다. 해철주가 돌아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두방루가 별당으로 들어와 외쳤다.
“주공, 요동의 군사들이 당도했습니다!”
“장수들을 모두 이리 불러라!”
잠시 후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중심으로 한 혁명군 수뇌부가 모두 별당에 모였다. 본부인 동부가를 지키고 있던 아우 연정토(淵淨土)와 집순(執盾) 유대룡(柳大龍), 연개소문의 오른팔격인 두방루(豆方婁)와 그의 친구인 술탈(述脫), 연정토의 심복인 생해(生偕)와 동부가의 무예 사범 추요선(秋要璇), 국내성주 고량(高量)의 아들인 고문(高文)과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 그리고 요동성주 고지순(高支純)이 보낸 걸곤우(乞昆羽)·걸중상(乞仲象) 부자와 온사문(溫沙門) 장군, 누이동생 연수영(淵秀英)과 낭자군 부대장 금화(金花) 등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연개소문의 첫번째 부인 고말리화(高茉利花)의 아버지인 고정의(高正義)가 있었다. 고정의는 전에 해승유와 임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그동안 가택에 연금당해 있었는데 이번 거사에 동참시킨 것이었다.
“그대들은 모두 고추가 전하께 예를 올려라! 우리의 새 태왕 폐하시다!”
연개소문의 말에 모두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오른팔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여 고추가 고장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모아 합창했다.
“태왕 폐하, 충성을 맹세합니다!”
고추가 고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고맙소! 이 사람이 덕이 부족하나마 달리는 범의 등에 올라탄 격이니 이제부터 그대들을 믿고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서겠소!”
“태왕 폐하, 만세!”
충성의 맹세가 끝나자 연개소문은 각자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거병은 패수 강변 열병식에서 시작한다. 두방루와 술탈은 가병 5백명을 지휘하여 나의 신호에 따라 태왕과 매국 역적 간신들을 모조리 척살하라! 거병 즉시 걸곤우와 걸중상 부자는 요동의 기병 2천명을 이끌고 황궁을 공격한다. 온사문과 추요선, 연수영과 금화는 각자의 군사를 이끌고 내 명령을 따르라! 소부손과 고문은 황성 밖에서 모든 성문과 통로를 차단하라! 특히 지방에서 원군이 달려오는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두가 우렁차게 합창한다.
그러고 나서 연개소문은 연정토와 유대룡에게 눈길을 돌린다.
“너희 둘은 내가 말한 명부를 다 만들어 놓았는가?”
“여기 있습니다.”
연정토가 품에서 명부를 꺼내 형에게 바쳤다. 그 명부는 이번 거사에서 쓸어 없애야 할 간신들의 명단, 다시 말해서 살생부(殺生簿)였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