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불교의 역사 개관

샛별 이주현 2006. 11. 15. 01:35

인도 불교역사 개관

 

 

지리상으로 인도의 권역(圈域)에서 전개된 불교를 인도불교라고 하며, 인도의 고대언어인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전수된 불교를 통칭하여 인도불교라고도 한다. 인도불교의 역사는 크게 넷으로 구분된다. 그 중 제1단계인 흥륭기(興隆期)는 초기불교시대라 하며, 제2단계인 분파기는 부파불교시대, 제3단계인 발달기는 대승불교시대이고, 제4단계인 쇠퇴기는 밀교시대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인도에 새롭게 등장한 신불교 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을 받으며 그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불교의 성립 배경

1. 역사적 배경
고대 인더스문명은 기원전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더스 강을 중심으로 하여 모헨조다로와 하랏파지역에 번성했던 토착민의 문명은 아리얀(a-ryan)족의 도래와 함께 쇠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얀족은 시베리아 남북과 투르키스탄(Turkestan) 등에 머물던 유목민으로서 기원전 17, 18세기경부터 민족 대이동을 시작하여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으로 진입했다. 아리얀족은 이미 철기문명을 향유하고 있었으며, 아직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드라비다족을 흡수, 지배하게 된다.

아리얀족의 도래를 계기로 하여 인도대륙은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고, 농업의 번성과 함께 농산물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과 농경용 기구 또는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수공업도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소도시들이 늘어나고 그를 기반으로 새롭게 대두된 자산가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제군주가 출현하여 16대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16대국 중 대부분이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각 나라의 이름은 앙가, 마가다, 카시, 코살라, 밧지, 말라, 체티, 밤사, 쿠루, 판찰라, 맛차, 수라세나, 앗사카, 아반티, 간다라, 캄보자 등이다. 16대국의 통치형태는 군주정치와 공화정치, 둘로 나누어진다. 밧지국과 말라국은 부족 공화정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제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치 형태의 나라였다. 그 중에서 특히 코살라와 마가다가 중심 세력을 이루어 패권을 다투었다.

도시국가들 간의 정복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마가다국의 빔비사라(기원전 582~554년 재위) 왕은 작은 나라들을 정복, 병합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국가의 형성기에 인도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제도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노예화시키고 아리얀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던 민족의식은 독특한 사회계급 제도인 카스트를 성립시켰는데, 이 제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4성(姓) 계급은 다음과 같다.

브라만 : 사제계급.
크샤트리야 : 왕족, 귀족, 무사 등의 지배계급.
바이쉬야 : 상인, 평민계급.
슈드라 : 노예계급.


또한 아리얀족의 종교문화는 지배적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았다. 아리얀족의 종교는 베다를 중심으로 한 브라만교였다.

브라만교의 성전인 4종의 주요 베다 중에서 『리그베다』는 기원전 2000년부터 150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도의 모든 성스런 지혜의 원천으로서 첫째 가는 문헌으로 꼽힌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아리얀족이 드라비다족을 비롯한 토착 원주민들의 관습이나 문화를 말살하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그들의 종교관을 비롯한 관습과 생활문화 전반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것이 쉬바 신앙과 요가행법이다. 특히 요가는 불교에도 채용되어 수행법으로서 널리 쓰였다.

2. 사문교단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가 무너지고,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 또한 점차 약화되었다.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전통적 종교였던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혁신 사상가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숲 속에서 수행하였다. 그들은 사문(沙門, sraman톋), 즉 유행자(遊行者)로 불렸는데, 본래 여기저기 방랑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종교적 수행을 목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이를 뜻한다. 사문(沙門)들의 수행공동체를 상가(sam톑ha, 僧伽)라고 한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사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자이나교의 개조로 꼽히는 마하비라도 그와 같은 사상적 조류 속에서 성장했다. 사문의 사상은 유물론, 불가지론, 영원 불변론, 일부 불변론, 유한 무한론, 회의론, 원자론 등 수백 종에 이르는 유파를 형성하여, 가히 사상의 홍수시대라 불릴 정도였다.

사문들은 정주처가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탁발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 모양으로 한 벌의 옷만을 걸치거나 나체 상태로 털투성이의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기도 했으며, 손톱을 자르지 않고 길게 기르는 이들도 있었다. 더러는 혼자서 수행하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이루기도 했으며, 스승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제자들이 함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양태를 보였던 사문들의 공통점은 기성 종교였던 브라만교의 이상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가혹하고 불평등한 카스트제도에 반기를 들었고, 각종 의식과 제례, 동물 희생제 등에 반대하였다. 불교와 자이나교 또한 이러한 사문에 의한 반(反)브라만교 운동의 하나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욕망을 떨치고 해탈이라는 초월적인 희구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고행했던 사문은 오랫동안 불교교단에서 수행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사문이란 열심히 수행하는 이로서 방일하지 않고 바르게 정진하여 마음의 삼매에 이른다고 한다.

붓다는 사문의 일원으로서 수행을 시작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는, 중도사상을 표방하여 고행수행을 부정하였다.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해탈도 얻지 못한다는 붓다의 깨달음은 새로운 사상의 정립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기원전 6세기경에 사문들은 마하비라를 따르는 자이나교단과 고타마 붓다를 따르는 붓다교단으로 크게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붓다가 등장하기까지 사문들이 각각 집단을 이루어 교세를 과시하기도 했으나, 사실상 체계적인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서 정립된 것은 마하비라를 중심으로 한 자이나교단이 최초였다. 붓다 또한 자이나교단의 조직체계를 따라 사부대중을 갖춘 교단으로 발전하는 데는 그다지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붓다 당시의 여러 사상은 서로 간의 대론을 통해서 자웅을 겨루었고 그 흥망이 가려졌다. 그러한 와중에 붓다교단 또한 타 학파와 논쟁을 통해서 크게 성장해 나갔다. 붓다의 교법은 사회ㆍ정치적 상위계층에게도 매력적인 사상으로 수용되었으며, 특히 빔비사라 왕의 재위 연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경전 곳곳에도 자주 등장하지만, 빔비사라 왕의 불교 외호는 매우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교단의 성립과 발전
붓다 당시의 교단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승가(僧伽)로 유행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가자들은 무소득(無所得)을 기본으로 하는 무소유 생활을 실천하였고, 어떠한 재물이나 가축, 노예 등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교단의 발전을 바라는 재가자의 보시물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으며, 붓다에게 귀의하는 자산가들이 기부한 토지와 금전을 토대로 하여 여러 곳에 정사와 사원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발전과정에서도 교단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으로 다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카쉬야파 3형제의 귀의이다. 우루빌바(Uluvilva-) 카쉬야파는 500명의 결발(結髮) 외도(jatㆍila)들을 이끌던 수장이었고, 나디(Nadi) 카쉬야파는 3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으며, 가야(Gaya-) 카쉬야파는 200명의 교도를 이끌던 수장이었는데, 이 세 형제가 나란히 붓다에게 귀의하였다. 그들이 함께 이끌고 온 제자들이 모여 불교교단은 그야말로 대도약을 하게 되었다.

둘째, 빔비사라(Bimbisa-ra) 왕의 외호이다. 붓다의 생존 당시에 마가다국의 왕이었던 빔비사라는 15세에 즉위하여 16세에 불법에 귀의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투르의 왕위 찬탈로 인해 유폐된 뒤 죽음을 맞았던 빔비사라 왕은 재위 당시에 불교만 후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교교단에 대해 우호적으로 베풀었던 것은 교단의 발전에 크나큰 힘으로 작용했다. 붓다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에 머물 때, 빔비사라 왕은 12만 명에 이르는 브라만과 장자들과 함께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나서 귀의했던 일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 때 설법을 들었던 12만 명 중에서 11만 명이 법안(法眼)을 얻었고, 1만 명이 붓다에게 귀의했다고 경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셋째, 최초의 승원(僧園), 죽림정사의 설립이다. 라자그리하에 세워진 죽림정사는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에 자리함으로써 포교의 본거지로서 큰 역할을 다하였다.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세울 때, 그 입지를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 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며,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

그 후로 이와 같은 입지가 바로 승원을 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승원은 구조적으로 정사(精舍), 평부옥(平覆屋), 전루(殿樓), 누방(樓房), 굴원(窟院) 등 다양한 양식을 따랐지만, 그 중에서 정사와 굴원이 가장 오랫 동안 사용되었다. 정사는 평지에 벽돌이나 돌로 건립되었고, 굴원은 고원의 암석지대에 인공적인 굴을 뚫어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굴원과 정사의 흔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초기교단의 원칙은 유행생활이었지만, 교단의 발전과 더불어서 정주생활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정립된 교단의 구성원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식차마나와 우바새, 우바이 등으로 세분되었다.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교단은 다양한 구성원 간에도 상호 민주적이며 평등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러한 교단 운영법은 붓다 당시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일찍이 붓다는 선언했었다.

“아난다여, 여래에게는 ‘나는 비구 승가를 보살핀다’라든지 ‘비구 승가는 나의 지휘 아래 있다’라는 생각은 없다.”

붓다 당시에도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교단이 운영되지 않았듯이, 후대의 불교교단사에서도 교단 구성원의 자율과 화합을 통해서 유지되었던 것은 당연한 추이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는 5비구의 출가를 계기로 승가(僧伽)를 형성하였고, 이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여 비구니를 포함한 승가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재가 신도들의 시주와 귀의로 우바새, 우바이도 포함된 사부대중(四部大衆) 공동체를 붓다의 교단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교단의 구성원은 흔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대중으로 보고 있다.

3. 경전의 결집
붓다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evamㆍmaya- srutam. 如是我聞).”

이와 같은 서두로 그들은 전법을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전편찬은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결집은 합송(合誦), 합주(合奏), 집회(集會)라고도 한다. 결집의 원어인 상기티(samㆍgI-ti)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읊는 것으로,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여 불설(佛說)을 확정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에서 결집은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경전편찬을 위한 집회가 결집이다.

경전은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즉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삼장은 경장, 율장, 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삼장의 형식으로 불교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경전은 서기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불교경전은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1차 결집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하자 몇 가지 우려가 있었다. 즉 그의 가르침이 차츰 없어진다든가, 잘못 전해진다든가, 이론(異論)이 제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모여 각기 구전으로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하고 가르침을 정리할 회의, 즉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의 교외에 있던 칠엽굴(七葉窟)에서 이루어졌는데, 마하카쉬야파(maha-ka-syapa)의 주도 아래 아난다(a-nanda)가 경장을 암송하였고, 우팔리(Upa-li)가 율장을 암송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편찬된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그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고급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중을 상대로 한 교화 설법에서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경전 결집, 즉 제1차 결집 당시에 사용된 언어 또한 마가다어라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경전 언어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팔리(pa-li)어 속에 몇몇 잔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결집
기원전 383년경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바이샬리(Vaisa-lI-)결집 또는 700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vr톔i)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10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10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디파방사(DI-pavam톝a)』와 『마하방사(Maha-vam톝a)』에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 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10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둘째,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셋째,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넷째,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서 하는 것.
다섯째,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여섯째,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일곱째,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여덟째,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아홉째,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열째,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淨法)으로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9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시키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
아쇼카 왕은 인도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아쇼카 왕은 기원전 260년경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쇼카 왕은 부왕이었던 빈두사라 왕이 그랬듯이,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쇼카 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수많은 불교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ㆍaliputra, 華氏城)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1,000결집, 화씨성 결집, 1,000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3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마하방사』와 『디파방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 왕(서기 73~103년 재위)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현장(玄斡)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불멸 400년경에 카슈미르(KasmI-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

파르슈와(Pa-rs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3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것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었다.


현대 인도불교

1. 신불교 운동
인도에서 다시 불교가 부흥한 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신불교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신불교 운동을 주창했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Dr. 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년)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암바바데(Ambavade)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에 해당하는 마하르(Mahar) 카스트 출신이었다. 마하르 카스트란 거리 청소나 소각 등을 담당하던 소위 ‘불가촉 천민’에 속하는 집단을 말한다.

힌두 사회에서, 불가촉 천민은 다만 탄생함으로써 존재로 인정될 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상층의 힌두계급과는 간접적으로도 접촉할 수 없을 만큼 열등한 신분을 지닌 집단이었다. 실제로 상층계급은 불가촉 천민의 그림자조차 닿기를 꺼려하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암베드카르는 정통적인 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차별은 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암베드카르가 1956년 10월 14일에 마하라슈트라 주의 나그푸르 시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개종식을 주도했던 첫째 동기도 바로 불교의 인간평등사상에 있었다. 그 당시 집단 개종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80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대부분은 하층계급에 속했다. 그 중 50만 명 정도가 불교로 개종했다고 전하는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개종했던 것은 유례에 없는 일로서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암베드카르는 개종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22가지 서약을 선포하였다.

1) 나는 브라만, 비슈누, 마하데바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2) 나는 라마와 크리슈나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3) 나는 가우리, 가나파티, 그 외 힌두교의 여러 남신, 여신을 인정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다.
4) ‘신은 화신으로 나타난다’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5) ‘붓다가 비슈누의 화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전승은 오류이다.
6) 나는 조령제(祖靈祭)를 행하지 않는다.
7) 나는 불교에 반하는 어떠한 말과 행위도 하지 않는다.
8) 나는 어떤 의식도 브라만의 손을 빌리지 않는다.
9) 나는 전 인류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인정한다.
10) 나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11) 나는 8정도(正道)를 준수한다.
12) 나는 10바라밀을 준수한다.
13) 나는 일체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준수한다.
14)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15) 나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16) 나는 삿된 음행을 범하지 않는다.
17)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18) 나는 불교의 지혜, 지계, 삼매에 따라 생활하고자 노력한다.
19) 나는 인간을 불평등하게 취급하는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20)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21) 나는 이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22) 나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신성하게 맹세한다.

이와 같은 서약을 외친 암베드카르가 “나와 함께 불교로 귀의할 사람은 일어서시오”라고 말하자 회의장의 참석자 전원이 일어나서 서약을 반복하고 개종하였다고 전한다.

신불교 운동을 주도했던 암베드카르의 궁극적 목적은 불가촉 천민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데 있었다. 슈드라의 신분이나 여성으로서는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규정하는 힌두교의 불평등을 비판하고, 불교의 평등주의를 고양시킨 암베드카르의 주창은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서 개종한 하층민들의 불교를 지칭하는 말로서 신불교(Neo-Buddhism)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지만, 이는 고타마 붓다의 사상과 다르다는 뜻은 아니었다.

암베드카르는 “현대사회에서 수용할 만한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다. 만약 현대사회가 불교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른 어떠한 종교도 붓다의 가르침 이상으로 지적이고 과학적인 현대인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개종식을 마친 암베드카르는 행사를 마치자마자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개최되는 세계불교도연맹의 개회식에 참석하여 연설하고 나서, 불교 유적지를 순례한 후 뭄바이로 돌아왔다. 그런데 1956년 12월 6일 아침,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타계로 인해 하층민들 사이에서 열렬했던 불교로의 개종이 멈출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나그푸르, 푸나, 아메다바드, 아그라 등지에서 집단적 개종은 계속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생전보다도 사후에 더 크게 발휘되었다.

현재, 신불교 교도들은 암베드카르의 이름인 빔라오(Bhimrao)를 따서 ‘비맘 샤라남 갓차미(Bhimam saranㆍam gacchami)’라고 귀경게의 목록에 편입시켰다. 불ㆍ법ㆍ승 3보에의 귀의만이 아니라 암베드카르에게도 귀의한다는 4보 귀의로 바뀐 것이다.

인도의 불교도들은 암베드카르가 보살과 같다고 여긴다. 인도불교도의 개종에 큰 역할을 했던 그의 공적을 인정한 결과이다. 현재 마하라슈트라 주를 중심으로 암베드카르의 유업을 잇고 있으며 불교로의 개종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2. 현대 인도불교의 부흥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는 근년에 들어서 불교신자가 급속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은 불교 자체의 부흥이라기보다는 불교를 통해 천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인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불교 개종식을 비롯한 불교집회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2001년 11월 4일에는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전 인도 불가촉민 연합회’의 의장인 람 라즈(Ram Raj)가 주도하는 집단 개종집회가 열렸다. 이 때 운집했던 100만 명에 달하는 하층민들이 불교로 개종하고자 했으나 그 중 8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고 집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집회에서 “우리는 더 이상 힌두의 신들에게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라는 선언이 낭독됨으로써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힌두교도와의 충돌을 우려한 정부 측의 강압적인 대응으로 인하여 개종의식이 순조롭게 성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인도불교청년회’, ‘불교도발전협회’ 등 여러 불교단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집회와 의식, 축제 등을 거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타르프라데쉬 주의 상카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석가족의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 보름에 개최하는 상카시아불교대축제의 경우는 2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행사로서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서 인도에 불교사원을 세우기 위한 각종 모금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해외 불교도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의 불교부흥에는 또 다른 요인이 덧붙여진다. 바로 티베트인들의 유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티베트지역을 중국이 점령한 뒤 거세지는 박해를 피하고자 티베트인들은 국경을 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는 약 10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피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도 이어지고 있는 티베트불교도들의 인도 이주는 사실상 인도불교의 재확산에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으며,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보다도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실제 현실이라고 본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의 스승들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도는 티베트불교의 직접적인 수혜자로서 새로운 인도불교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흔히 인도에서 지속적이고 살아 있는 불교로서의 전통은 끊겼다고는 말해 왔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제 불교의 산실에서 재생하는 기미가 확연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대한불교 조계계종 인터넷 자료
출처 : 청산백운
글쓴이 : mangu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