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한국 아동문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

샛별 이주현 2015. 4. 27. 13:36

한국 아동문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


윤 동 재(시인, 고려대 강사)

 

1. 아동문학 평론의 중요성

성인문학의 독자가 어른이라면 아동문학의 독자는 아이와 어른이다. 아동문학은 어른도 읽을 수 있지만 성인문학은 아이들이 읽을 수 없다. 아동문학은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독자층이 성인문학보다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동문학의 주 독자인 아이들은 좋은 아동문학을 읽으면서 문학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 보람을 알게 된다. 어릴 때부터 좋은 아동문학과 친숙해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문학을 더욱 가까이 하며, 문학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꿀 수 있게 된다.


아동문학평론은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한다.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하면서 좋은 아동문학을 가려내는 일과 아동문학 창작의 원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동문학 평론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하겠다.


최근 아동문학에 대한 부쩍 높아진 관심과 아동도서 시장의 확대에 힘입어 창작은 매우 활발하다. 앞 시대 대부분의 아동문학 작품집 출판이 자비 출판에 의존했던 데 비하여 정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출판되고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문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두고 있다. 그러나 아동문학 평론 쪽으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다르다. 창작집 출판이 활발한 것과는 달리 상대적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더러 아동문학을 연구한 책이나 아동문학을 대상으로 한 평론집 출간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출간되고 있는 아동문학 연구서나 평론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마저도 무턱대고 환영할 수만도 없다.


출간된 아동문학 연구서의 대부분은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독자적 시각도 없이 대학의 교재용으로 서둘러서 엮은 개론서이고, 외국의 아동문학 이론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아동문학을 다루고 있는 평론집이라 하더라도 현재 활발히 창작되고 있는 한국 아동문학 작품을 성실히 읽고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일과 거기서부터 이론을 도출해 내는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아동문학 평론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2. 원종찬 평론집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의 의의

2001년 1월 출간된 원종찬의 평론집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창작과비평사, 2001)은 이오덕의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 1977) 이후 독자적인 시각에 따라 쓰여진 주목할 만한 성과물이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이 한국 아동문학이 성인문학과 외국 아동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갖게 된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서민성을 회복하면서 '시정신'이라는 진정한 문학정신을 회복할 때만 발전할 수 있다는 뜻에서 출간된 저서라면, 이 책은 한국 아동문학에 대해서 예사롭지 않은 문제의식을 갖고 성실히 탐구한 결과를 보여주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주목되나 그 의의를 밝혀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한국아동문학의 통괄적 이해를 꾀하고 있는 점이다. 기존의 아동문학 연구서나 평론집은 한국아동문학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에 그치고 있다. 더욱이 엄정한 학문적 체계에 따라 쓴 글이 드물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아동문학에 대한 연구와 평론활동을 함께 해 오면서, 엄정한 학문적 체계에 따라 쓴, "한일 아동문학의 기원과 성격 비교", "한국 아동문학이 창조한 주인공", "한국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 "한국 현대아동문학사의 쟁점" 등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글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한국아동문학사에 대한 통괄적인 이해를 꾀하고 있다.


둘째, 폭넓고 깊이 있는 공부를 바탕으로 한 이론적 안목을 보여주고자 힘썼다. 이는 프로 아동문학인, 월북 문인, 재북 문인 등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요시인 윤복진의 작품세계>, <동화작가 노양근의 삶과 문학>, <동화작가 최병화의 삶과 문학>, <아동문학과 리얼리즘> 등의 글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월북 문인들에 대한 해금 조치가 있기 전에는 이런 연구는 쉽지 않았다. 이 점에 비추어 본다면 연구자로서, 또 평론가로서 그는 해금 조치 이후 연구·평론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행복을 누리는 연구자요 평론가라 할 수 있다.


셋째, 자신의 관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속류사회학주의 비판' '판타지 논의'를 시도했다. '속류사회학주의'는 용어 자체부터 아동문학계에서는 그 동안 거의 쓰지 않던 말이었다. 그가 새로운 용어를 과감하게 끌어오고 있는 것은 그만의 독자적 시각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이다. 판타지 논의는 한국 아동문학에서 그 동안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진 편은 아니다. 그는 판타지가 한국 아동문학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3. 원종찬의 견해에 대한 비판과 반론

가. 속류사회학주의 비판

원종찬의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은 의욕적인 자세와 성실한 탐구로 쓰여진 것은 틀림없지만, 독자적인 시각으로 한국 아동문학에 대해 접근하고 있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종찬의 글에서 거의 어김없이 나오는 말은 '속류' 혹은 '속류사회학주의'가 아닌가 한다. 대부분의 글에서 이 말이 꼭 나오는 것은 그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니더라도 이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어떤 말 앞에다 '속류'란 말을 갖다 붙일 때는 좋은 뜻으로보다는 대개 나쁜 뜻으로 쓰인다. '속류 관념론', '속류 객관주의', '속류 유물론', '속류 맑시스트'라고 할 때, '속류'는 좋은 뜻으로보다는 나쁜 뜻으로 쓰인다.

 

문제는 원종찬이 <한국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글에서 속류사회학주의는 교훈주의의 변종이라고 한 데 있다. 즉 그는 교훈주의가 잘못되면 속류사회학주의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교훈주의는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보고 도덕적·교육적 견지에서 이야기를 제공하려는 태도'를 두고 말한다. 따라서 교훈주의가 잘못되면 속류사회학주의가 된다고 할 수 없다. 속류사회학주의는 현실주의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문학사회학의 폐단과 잘못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잘 알려진 대로 문학 사회학은 문학과 사회의 관계를 문제삼는다. 문학사회학에서는 "문학 작품은 현실 세계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문학 작품은 상상력만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현실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읽으면 마땅히 사회 현실을 이해할 수 있고,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사회학이 잘못되면 속류사회학주의가 된다.


'속류사회학주의'라는 말은 결코 교훈주의의 변종이 아니다. '속류사회학주의'는 언제나 문학사회학 즉, 반영론에 바탕한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잘못이나 폐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종찬이 이를 교훈주의의 변종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그가 속류사회학주의라고 말한 것은 모두가 현실주의 문학의 잘못이나 폐단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들이다.

 

"속류사회학주의는 사회학으로 대신할 수 없는 문학 고유의 몫을 좁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사회 문제의 폭로와 고발, 민중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 따위에 눈을 돌리다 보니 일종의 소재주의로 기울면서 진부한 생활동화와 우화류를 남발하였고, 이것은 판타지를 비롯한 아동문학 고유의 양식 탐구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19쪽)."

 

인용한 부분은 원종찬이 교훈주의의 변종이라고 하면서, '속류사회학주의'를 들고 있는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그가 무어라고 말했든 간에 자세히 뜯어볼 필요도 없이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잘못이나 폐단을 지적한 것으로 읽힌다.


'사회 문제의 폭로와 고발, 민중 현실의 반영'은 잘 알려진 대로 바로 현실주의 아동문학이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그리고 사회 문제의 폭로와 고발, 민중 현실의 반영은 그 자체로는 전혀 나쁠 것이 없지만 이것이 그의 지적대로 직접적으로 되어 있다면, 이는 문학으로서는 큰 결함이다. 이를 두고 옹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비판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잘못과 폐단일 뿐이지, 그가 말하는 대로 교훈주의의 변종일 수는 없다. 이를 두고 교훈주의의 변종이라고 한다면 사실의 왜곡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종찬은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그의 주요 관심사는 현실주의 아동문학이었고, 실제로 그의 책에 실린 상당수의 글을 보면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선배들, 특히 프로 아동문학인, 그리고 월북문인, 재북문인의 작품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한국 아동문학계에서는 매우 드문 일에 속한다. 그리고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아동문학인들은 현실주의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이오덕, 권정생 등이었다. 이런 그가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대해 그 잘못과 폐단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적하고 나서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인용한 부분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 대해서는 그의 인식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현실주의 아동문학(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이를 두고 교훈주의의 변종인 속류사회학주의라고 말하고 있다)이 '진부한 생활동화와 우화류를 남발하였고', '판타지를 비롯한 아동문학 고유의 양식 탐구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지적에 따르면, 한국 아동문학의 잘못이나 폐단이 온통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이다. 지난 시기 '판타지나 문학 고유의 양식 탐구'를 현실주의 아동문학이 가로막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국 아동문학에서 '판타지나 문학 고유의 양식 탐구'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 아동문학인 스스로가 이를 위한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전개 과정을 돌아볼 때, 문학활동의 제약은 오히려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가해졌다.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줄곧 가해진 탄압과 제약을 상기해 보라. 가깝게는 '아동문학에도 민중문학론 침투' 운운하면서 군부독재정권이 저 80년대 중반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가한 탄압은 너무도 생생하지 않는가. 현실주의 아동문학을 하는 일은 대단한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를 두고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바꿔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종찬의 속류사회학주의 비판은 현실주의 아동문학을 망설임 없이 정면으로 비판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직접 비판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정작 비판하지 않고 엉뚱한 대상을 들먹여 현실주의 아동문학을 비판하려고 하니 일이 잘못되었다. 원종찬이 첫 평론집에서 보여준 이러한 태도와 자세는 그의 입장이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지나친 눈치보기이며, 떳떳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판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 현실주의 아동문학에도 잘못이나 폐단이 있을 수 있다. 눈치보기식 비판이나 두루뭉수리식의 비판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왜곡시켜 하는 비판에 이르러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 비판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정면으로 다룰 일이다. 잘못이나 폐해는 그것이 어떤 내용의 것이라 할 지라도 서둘러 고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현실주의 아동문학의 폐단이 속류사회학주의라면 그를 왜곡시켜서 말하지 말고 정면으로 거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면으로 다루되 작품을 반드시 들어서 하는 것이 좋다. 속류사회학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원종찬의 글을 보면 작품은 한 편도 예로 들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하면 '쌀 없이 밥 짓기'를 하는 꼴이 될 뿐이다. 밥이 지어질 리가 없다.

 

나. 판타지 논의

원종찬의 평론집은 여러 곳에서 판타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판타지가 오늘날 한국 아동문학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판타지가 한국 아동문학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원종찬의 판타지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단편적인 지적으로만 그치고,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는 글은 한 편뿐이어서 아쉬움을 던져준다. 판타지를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한다.


<이원수 판타지 동화와 민족 현실>이란 글은 원종찬이 판타지 문제를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글이다. 1999년 4월∼6월 <<어린이문학>>에 발표한 이 글은 실은 판타지 논의의 변죽만 울린 꼴이 되었다. 이원수의 동화 <숲속 나라>를 논의 대상으로 잡고 있는 이 글은 '이원수와 8.15해방', '이원수와 조선문학가동맹', '<숲속 나라>와 해방기 민족 현실'이라는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판타지와 별 관련이 없는 당대 정치 사회 현실과 문단 이야기들을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앞에서 원종찬은 속류사회학주의를 비판하면서 구체적인 작품은 실제로 한편도 들고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속류사회학주의의 폐단을 보여주고 있는 글을 들라면 아마도 이 글이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한다. 모두 22쪽에 이르는 이 글은 1쪽에서부터 10쪽에 이르기까지 <숲속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11쪽에 가서야 겨우 다루고자 하는 작품 <숲속 나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부터도 민족 현실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사회학적인 지식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는 이런 태도를 우리는 속류사회학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문학 작품에 나타난 속류사회학주의도 잘못이지만 문학 작품을 다루고 있는 글에 나타난 속류사회학주의도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이원수의 동화 <숲속 나라>는 1949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해방을 맞은 다음,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를 판타지 기법을 써서 그린 작품이다. "느티나무 구멍"을 빠져나가면 갈 수 있는 곳이 '숲속 나라'이다. '숲속 나라'에 가기만 하면 새와도 말할 수 있고, 시냇물과도 말할 수 있고, 사과와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숲속 나라' 사람들은 모두 모리배들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 과학을 연구하면서 서로 돕고 서로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숲속 나라'는 어른이 주인이 아니라 아이들이 주인인 나라이다. 자기 욕심만 차리는 사람도 없고, 남을 속이는 사람도 없는 곳이 '숲속 나라'이다.


<숲속 나라>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알려 준다. 하나는 이런 정도의 내용이라도 해방기 민족현실에서는 판타지 기법으로 에둘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숲속 나라>를 둘러싼 그간의 논의가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판타지를 단순히 몽상이나 백일몽에 가까운 것으로만 치부해 버리고는 배척하는 태도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란 점이다. 판타지는 답답한 일상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도 하지만, 결코 인간의 삶과 무관한, 삶의 현실과 무관한 몽상이나 공상쯤으로만 여겨서도 안되겠다는 점이다.


판타지 논의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다만 어떤 시각으로 판타지를 바라보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판타지 기법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는 지금부터 진지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논의 자체를 덮어놓고 배척하거나 곱지않은 눈길로 보아서는 알 될 것이다.


다음은 판타지에 대해 원종찬이 단편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다.

① 최근 들어서 판타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국 아동문학이 갑자기 부풀어오르게 된 근거를 시민사회 영역의 확대 곧 사회성격의 변화에서 찾는다면, 일반문학과 함께 지난 일세기 동안 나름대로 적응을 해온 현실 모사의 흐름보다는, 사회 성격 자체로부터 제약되었던 판타지의 흐름에 눈길을 돌리는 게 무척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쪽에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23-24쪽)


② 근대 역사를 떠받쳐온 이념에 대한 회의와 가치관의 붕괴현상을 오늘날 우리는 온몸으로 겪고 있다. 길이 없어져 버린 시대, 판타지는 사막의 신기루가 될 수도 있고 오아시스가 될 수도 있다. 우선 판타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혼을 나누는 열림의 형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생태위기의 대안으로서도 눈길을 끈다. 거침없는 상상력의 발동은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와 일상으로 굳어진 상식의 관념들에 균열을 내면서 '저 너머의 푸른 세계'로 우리를 손짓한다. 판타지를 현실로부터의 자유로운 비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간절히 원하지만 현실에서는 결핍된 어떤 절실함'에 바탕을 둘수록 높이 솟구쳐오를 것이다.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도피심리 곧 동심주의에서 비롯된 허황된 이야기라든지, 교훈주의와 속류사회학주의에 말라붙은 통속적인 이미지의 조잡한 짜맞추기, 또는 속이 뻔한 우화 따위로는 길이 없어져 버린 시대의 사막을 건널 수 없다. 판타지가 자유 분방한 상상력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그 핵심은 역시 상상력을 뒷받침하는 철학에 달려 있다. 변형·부활되는 낡은 경향에 유의하면서 진정성에 바탕을 둔 문명사적 통찰이 요구된다.(24쪽)


③ 한국근대아동문학은 판타지보다는 사실동화와 의인동화 또는 우화류가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다. 이는 고스란히 우리 아동문학의 약점일 수도 있다. (91쪽)


④ 작가의 성실성의 지표가 형식 탐구와 따로 존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요즘 아이들은 '자본에 거의 완벽하게 포섭된 비좁은 일상체험'의 틀에 갇혀 지낸다. 그래서 아이들의 일상사를 그대로 수용하려 드는 현실 반영의 문학은 참다운 삶에 대한 전망과 연결되기가 아주 힘들다. 최근 들어 판타지에 주목하는 진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139쪽)

 

①, ②. ③, ④ 모두 판타지의 중요성과 판타지에 거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단편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판타지에 대한 신념에 찬 애정과 판타지에 거는 희망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②에서 인용한 대목 가운데 "판타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혼을 나누는 열림의 형식을 지향하기 때문에 생태위기의 대안으로서도 눈길을 끈다. 거침없는 상상력의 발동은 인간 중심의 가치체계와 일상으로 굳어진 상식의 관념들에 균열을 내면서 '저 너머의 푸른 세계'로 우리를 손짓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판타지에 대한 너무 지나친 기대요 평가가 아닌가 한다. 특히 여기서 '판타지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동등하게 혼을 나누는 열림의 형식을 지향'한다라고 한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그리고 "판타지가 생태 위기의 대안"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요즘 '녹색 문학'이니 '문학 생태학'이란 말이 세상에 유행하니 말이 좋아 보여서 그냥 아무렇게나 끌어다 붙여본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다. 선행 업적 검토

원종찬은 선배 연구자들이나 비평가들의 글에 대해 공을 인정하는 데는 조금 인색한 것이아닌가 한다. 원종찬이 그의 글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선배 연구자나 비평가는 세 사람이다. 이재철, 이원수, 이오덕이다. 이들 세 사람 가운데 원종찬이 특히 문제 삼고 있는 사람은 이재철이다.


먼저 이재철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이재철은 한국 아동문학을 평생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때로 비평적인 글도 많이 발표한 학자이다. 그는 여기 저기 흩어진 한국 아동문학 관련 자료를 돌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 애써 모으고, 정리했으며 특히 프로 아동문학인, 월북, 재북 아동문학인 관련 자료에 대해서도 잘 정리해 놓았다. 또한 그는 한국 아동문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유일한 한국 아동문학사인 <<한국현대아동문학사>>(일지사, 1978)라는 독보적 저서를 내놓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이재철이 한국아동문학에 끼친 공은 여간 크지 않다.


그러나 원종찬은 이재철의 공을 인정하는 데는 조금 인색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이재철의 업적에 대한 체면치레용 언사는 있지만, 특히 그 자신의 연구나 비평활동과 겹쳐지는 부분의 중요한 업적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이는 연구자로서, 또 비평가로서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프로 아동문학인, 월북 아동문학인, 재북 아동문학인에 대한 이재철의 연구 업적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는 프로 아동문학인이라 해서 빠트리지도 않았고, 월북 아동문학인·재북 아동문학인이라고 해서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는 1978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당시는 해금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특히 월북 아동문학인, 혹은 재북 아동문학인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재철은 <<한국현대아동문학사>>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 아동문학사에 자리 매김까지 하고 있다.


원종찬은 그의 글에서 월북 문인 윤복진, 재북 문인 노양근, 1930년대 중요한 프로 아동문학인이었던 최병화 등을 다루고 있다. 이들 세 사람의 아동문학인들은 이재철이 <<한국현대아동문학사>>에서 이미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종찬은 이재철이 <<한국현대아동문학사>>에서 이들을 다루었다는 사실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은 그가 특별한 관심을 두고 연구·비평활동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그의 논문 <한국현대아동문학사의 쟁점>은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 한 권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이재철의 책에서 이 대목을 읽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윤복진을 다루고 있는 그의 글을 보면, 윤복진의 동요가 동심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아이들의 구체적인 생활 현실을 해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그보다 먼저 윤복진의 동요를 연구한 류덕희·고성휘가 <<한국동요발달사>>에서 내린 평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가 미처 읽어보지 못한 듯하다.


원종찬은 이재철의 공을 인정하는 데 조금 인색한 것과 달리 그를 나무라는 데는 오히려 적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현대아동문학사의 쟁점>은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를 검토한 논문이다. 여기서 원종찬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첫째, 한국 현대아동문학사의 시대 구분문제, 둘째, 현대아동문학사의 기점과 최남선의 <<소년>>지 평가 문제, 셋째, 프로 아동문학과 월북 아동문학인에 대한 평가 문제, 넷째, 주요 작가의 작품론에 대한 평가 기준의 문제이다.


먼저 시대구분 문제를 다룬 대목을 보면, 비판만 있지 아무런 대안이 없다. 자신의 시대 구분 기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고, 남의 시대 구분 기준만 나무라고 있다. 또, 이재철이 한국아동문학의 기원은 최남선의 <<소년>>에서 태동하여 방정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았는데, 원종찬은 최남선의 <<소년>>을 한국아동문학의 전사로 이해하면서 방정환에서 진정한 출발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재철이 말한 것이나 원종찬이 말한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최남선의 <<소년>>에서 태동하여 방정환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는 말이나 '최남선의 <<소년>>을 전사로 이해하면서 방정환에서 진정한 출발'을 했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닌가. '태동'과 '전사', '본격적'과 '진정한'은 말만 바꿔치기 한 것일 뿐이다. 월북 아동문학인과 주요 작가의 작품론에 대한 평가 기준에서도 현덕을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나무라고 있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이 점은 달리 본다는 사실과 그 차이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은 이원수와 이오덕의 비평을 다룬 글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 온 이원수와 이오덕은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국 아동문학이 서민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보았던 대표적인 논객들이다. 그런데 원종찬이 보기에는 이오덕의 경우는 이원수를 잇고 있으면서도 이원수가 탐구한 것 이상의 문학사적 접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더욱이 이오덕의 1980년대 이후의 비평 활동은 1970년대의 비평활동보다 발전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원수와 이오덕의 비평은 문화비평 사회비평의 몫은 충분히 감당했지만 문학의 논리에 입각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는 겉핥기식 이해가 아닌가 한다.

이원수가 아동문학에 관한 비평적 발언을 계속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의 비평이 일으킨 반향보다 이오덕의 비평이 한국 아동문학계 전반에 걸쳐 일으킨 반향이 훨씬 컸다는 점을 돌아볼 때, 이오덕의 비평활동에 대한 그의 평가는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이원수와 이오덕의 비평은 문학의 논리에 입각하지 않았다고 본 것은 그들 비평의 본질을 충분히 꿰뚫지 못하고 내린 평가가 아닌가 한다. 그들이 동심천사주의와 교훈주의를 비판하고 아동문학에서 서민성을 강조한 것은 한국 아동문학 작품 밖의 논리를 끌어와서 들이댄 것이 아니라 한국 아동문학 작품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읽고 한국아동문학 작품 안에서 찾아낸 논리인 것이다. 이를 두고 사회비평, 문화비평 운운하고 문학의 논리에 입각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겉도 속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이다.

 

4. 한국 아동문학 평론의 나아갈 방향

원종찬의 첫 평론집 <<아동문학과 비평정신>>은 아동문학을 다루고 있는 예사 책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평론집의 두드러진 점은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책 속에서 속류사회학주의 비판과 판타지 논의, 그리고 선행 업적에 대한 평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도 있지만, 그의 첫 평론집은 지금까지의 비판적인 검토에서 이미 살펴본 아쉬움 말고도 몇 가지 아쉬움을 더 갖게 한다. 이 책에는 동시를 다루고 있는 본격적인 글이 없다. 대부분의 논의가 동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책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 아동문학과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아동문학에 대해서만 주로 다루고 있다. 평론과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 저서에서는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문학평론가는 많아도 아동문학평론가는 드문 현실을 돌아볼 때, 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 더욱이 그는 독자적인 관점과 성실함마저 갖추고 있다. 그가 아동문학평론가로서 온전히 제몫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그에게 한두 마디 간곡한 부탁을 해 본다면 그는 <세기의 길목에서>라고 제목을 단 머리말 가운데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뜨리고 나갈 더 젊고 참신한 후학들을 고대한다"라고 했는데, 제발 후학들을 고대하지 말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깨뜨리고 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아동문학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첫 저서를 내고 나서 벌써 징검다리가 되겠다고도 했는데, 지금 징검다리는 너무 많다. 그 징검다리를 딛고 갈 사람이 없을 뿐이다. 아직은 징검다리가 되려고 하지 말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되라. 지금 불혹을 조금 넘긴 그의 나이로 볼 때 이 두 가지는 결코 무리한 부탁도, 무례한 부탁도 아닐 것이다.

끝으로 한국 아동문학 평론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간단히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을 성실하게 읽고 작품에서부터 이론을 도출해야겠다는 것이다. 작품에서 나오지 않은 이론은 공리공론일 뿐이다. 문학 연구와 비평은 작품 읽기에서 출발한다. 한국 아동문학 평론은 한국 아동문학 작품을 성실히 읽는 데서 출발한다. 작품 읽기에서 출발해야만 이론도 도출할 수 있고, 창작의 지침도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상호 대화의 장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문학관이나 비평관이 같은 사람의 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글도 부지런히 읽자는 것이다. 남의 글을 읽고 나서는 의견 주고 받기도 활발히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서로 부족한 점을 메워 나가자는 것이다. 한국 아동문학의 진정한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는 토론의 활성화가 절실하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거나 문학관, 비평관이 다르다 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셋째, 작품 창작의 비전을 과감하게 제시해 보자는 것이다. 평론은 작품의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는 구실도 해야 하지만, 창작의 원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구실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pen063

출처 : 박종국에세이칼럼블로그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