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6) 연해한인자치주
6)연해한인자치주
1937년 8월 21일은 원동지방 등 연해주 일대에 살던 우리동포들이 구 소련의 계획적이고 집단적인 강제이주작전에 의해 화물차 짐칸 안에서 생활하면서 철저한 ‘40일 민족수난’이 시작된 날이다.
구 소련 해체후 각 가맹공화국이 독립하였지만 우리동포들의 ‘이산(離散)의 민족수난’은 계속되고 있어 역사를 통해 이를 알아본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서 50km인 소야(宗谷)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사할린이라는 큰 섬이 하나 있는데 이 땅에 우리민족 4만 여명이 살고 있다.
이 사할린은 러시아 사람들도 ‘마로스(춥다는 뜻)’라고 하면서 무서워하는 북쪽바다의 땅이다.
사할린은 비록 아세아 대륙 동쪽 일본열도 최북단에 위치한 큰 섬이기는 하나 기후관계로 오랫동안 사람이 별로 살지 않은 불모지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동쪽대륙에서 발해민족들이 사할린으로 건너가 고기도 잡고 짐승사냥도 하면서 정착했다.
사할린은 과거 중국이 관청까지 설립하여 관할한 영토였으나 1853년 제정(帝政)러시아가 청(淸)나라 정부를 협박 사할린을 강제로 러시아영토에 귀속시켜버렸다.
그 후 일- 러 사이 체결된 포츠머스(미국)조약에 의해 북위 50도선을 경계로 북부는 러시아에 그대로 있고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사할린은 석유, 석탄, 철광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며, 또 동쪽의 오호츠크해가 세계3대 어장(漁場)가운데 하나였던 관계로 사할린이 일본 땅이 되면서부터 6만 여명의 많은 조선사람들이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돼 광산, 탄광, 목재판과 일본군의 군용공항 및 군용도로 건설장에서 죽도록 일했다.
해방후인 1958년 2월 ‘사할린억류귀환조선인회’가 사할린에서 결성되었다.
차츰 30여개의 러시아인 소- 중학교에 조선어과목이 설치되었으며 조선인 학교도 몇 개 세워졌다.
연해주는 러시아 극동 7개주(州- 연해, 하바로프스크, 아무르, 캄자카, 마가단, 사할린, 야쿠르)중 사할린주(州) 다음으로 작은 주다.
그러나 면적은 16만6000㎢로 우리나라 남북한에 버금가는 넓이를 갖고 있다.
최초로 연해주에 우리민족이 집거한 지구는 북한 두만강시 건너편에 있는 오늘의 하산지구(당시 포시예트구역)와 우수리스크 지구, 나호트카 항구 북쪽의 빠르치산 지구(당시 산좋고 물좋은 곳이라 하여 수청- 水淸이라고 불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구(당시는 해삼위-海參威라고 불렀다)등 이었다.
제정(帝政)러시아 정부는 초기 우리민족 이주민에 대해 반드시 러시아 국적에 가입하고 슬라브 동정교를 믿어야 하며 러시아말을 배워 점차 러시아인에게 동화되어야만 원호인(原戶人)이라하여, 이주민에게 땅을 주었고, 국가기관과 군대에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며, 우리민족의 자제들 또한 러시아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민족 이주민들은 돌아가면 돌아갔지 러시아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하자 러시아정부에서는 러시아국적 가입을 거절하는 이 부류의 사람들을 누호인(漏戶人), 다시말하면 호적에서 빠진 사람이라고 취급해, 그들에게는 정치권리는 물론 심지어 땅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누호인’들은 부득불 ‘원호인’부농들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그들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였으며 또 광산이나 철도부설공사장에 가서 노예노동을 했다.
한편 한- 일 강제합방을 전후하여 많은 우리나라 의병(義兵)들과 독립투사들이 러시아 연해주지역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이주민수도 급격히 증가, 1910년 5만5000여명이었던 것이 1926년에는 두배 이상인 12만3000명으로 늘어났는데 동북(만주)의 우리나라 이주민들은 이들을 우수리스강 이남에 살고 있다하여 '아래강동 사람'이라고 부르고 서로간의 왕래를 활발히 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이상설, 이동휘, 정세관, 이강 박영갑등과 같은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독립활동을 진행했다.
당시 해삼위에 있는 신한촌과 포시예트 구역의 연추는 러시아 연해주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되었다.
맨 처음 러시아로 넘어온 의병부대는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의 친위대였는데 이 군대는 러- 일 전쟁시기 중국동북에서 러시아 군대와 함께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연해주 지방으로 넘어왔다.
그 뒤를 따라 러시아 포시예트 지역으로 넘어온 의병은 허영창(허재욱)부대이고 안중근, 우덕순, 최재형 등 의병장들이 이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하였으며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일본군과 싸우고 일본의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전투는 안중근, 우덕순이 8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시 어려운 형편에 처한 홍범도 의병대를 원조하기 위해 무산지구에 진출하여 일본군 5000명과 싸운 전투이다.
이시기 안중근은 러시아에 거주한 우리민족들의 부락에 서당과 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강화하였고 성인들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등사판과 석판인쇄기를 사용, 교과서들을 만들어 연해주 전지역에 보급했다.
당시 연해주 우리민족 집거 지구는 일인일살(一人一殺)의 의열활동(義烈活動) 중심이 되고 있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과 우덕순은 일제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 러시아 제정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오리라는 통보를 받고 이토오를 죽이려고 연해주를 떠나 하얼빈으로 갔는데 끝내 이등박문을 하얼빈역 광장에서 쏘아 죽였다.
그 뒤 러시아의 애국청년들 중에는 안중근을 본받아 일본의 정치 및 군사계 요인들에 대한 ‘암살공작’을 일삼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예를 들면 1912년 일본내각수상 가쭈라가 특별열차를 타고 베트로그라드로 간다는 정보를 받은 이기봉이라는 청년이 모스크바역에서 쏘아 죽이려고 했으나 그때 마침 명치천황이 죽게되어 가쭈라가 중도에서 돌아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또 1916년 해삼위에서 ‘소년모험단’의 사명을 받고 박춘근, 김형식이라는 청년이 폭탄6개를 가지고 서울에 가서 사이또 총독을 죽이려고 원산까지 갔다가 우리나라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성공 못한 일도 발생했다.
차후 강우규라는 노인이 그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사이토 총독을 중상시킨 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한편 동북침략에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영사관을 설치한 일제는 여러 차례 소련침공을 시도하면서 연해주 등지에서 특무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스탈린은 “조선사람은 결국 일본인이 된다”고 오판, 소수민족 원거리 이주정책이라는 극좌노선을 내걸고 중앙아시아로 우리민족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을 생각했다.
중국공산당이 우리민족을 포용, 공동항일투쟁을 벌인 것과는 달리 스탈린은 우리민족을 무시하는 소수민족관을 가지고 우리민족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수만명 이상의 노인과 어린이들이 굶주리거나 얼어죽었으며 우리말과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우리민족 이주민은 1937년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이 연해주와 아무르주지구에 집거해 왔다. 소련정부는 1937년을 전후하여 우리민족의 지식층들을 ‘일본간첩’, ‘민족주의 분자’, ‘이색분자’라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씌우고 체포하여 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사형시켰다.
강제이주의 대사건은 소련정부가 일본이 동북지구와 인접한 원동지방을 수시로 침범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일본인과 비슷한 우리동포들을 사전에 국경지대에서 멀리 보내야 한다고 오판, 1937년 8월 21일부터 원동지구의 우리민족을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집단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1937년 8월 21일 구 소련 부장회의 주석 몰로토브와 중앙총서기 스탈린이 서명한 ‘1428-326호 비밀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중앙비밀지시가 있었다.
첫째, 일본간첩의 원동지구에 대한 침투를 제지시키고 소련의 안전을 위하여 원동지구의 조선이주민을 전부 남카자흐스탄, 아랄해, 발하슈호연안지역, 그리고 우즈베크가맹공화국에 이주시킬 것.
둘째, 이주는 늦어도 1938년 1월 1일 전으로 전부 끝낼 것.
세째, 이주하는 조선인들에게 재산, 가정도구, 가구물품을 가지고 가도록 허가해 줄 것.
네째, 이주하는 조선인들에게 그들이 두고 가는 동산과 부동산, 거두지 못한 수확물에 대해서는 일정한 보상을 해줄 것.
다섯째, 카자흐가맹공화국과 우즈베크가맹공화국에 사는 이주민들을 안착시킬 지역을 정해주며 그들이 새고장에서 무사히 지내도록 후원해 줄 것 등이다.
이 지시에 의해 1937년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모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강제이주 임무를 집행한 내무인민위원 예조브가 부장회의 주석 몰로토브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37년 10월 25일 원동지구 조선인 이주는 끝났다. 이주한 조선인은 도합 3만6442세대 17만1081명이며 그들은 <124열>의 수송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갔다.
캄챠드카와 오호츠크에 남아있는 조선인은 그 외 특별 이주자를 포함하여 약 700명 가량 되는데 이들도 금년 11월 1일쯤 전부 열차로 떠나게 될 것이다.
1만6272세대 7만6525명은 우즈베크공화국으로 분산시켜 후송하였다.”
이상의 비밀문건들은 최근 구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것이다.
이주는 완전히 내무부 사복경찰들의 엄격한 감시 하에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집단적인 강제이주는 추수가 한창인 9월 중순쯤부터 시작되었는데 소련정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에 대해서 보상을 해준다고 했지만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그 당시 당사자들의 회고에 의하면 “가을 어느 날 내무부의 경찰들이 조선마을에 내려오더니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선사람들은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된다는 중앙지시를 낭독했다.
그리고는 간단히 먹을 것과 갈아입을 의복들만 준비하여 규정한 날까지 어디로 모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일 중앙의 지시에 불복언론을 살포하는 자에 대해서는 현행 반혁명으로 취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한다는 소식을 들은 날부터 떠나는 날까지는 불과 3~ 4일밖에 남지 않았으며 또 어디로 어째서 가야한다는 것 등의 문제도 이주민들은 물을 수 없었다.
강제이주를 당하다보니 수십년 동안 애써 가꾸어온 논밭은 물론 모든 주택, 가축, 그리고 살림도구들은 모두 그대로 두고 떠났던 것이었다.
우리민족들은 내무경찰의 감시 하에 죄수들처럼 제각기 가정을 이끌고 지정한 화물차 짐칸에 올라탔다.
3만6000여세대 17만여명의 사람들이 124열차 수송화물차에 실려갔다고 하니 한 열차에 적어도 300세대씩 탄 셈이다.
한 열차에 화물차짐칸을 평균30개 달았다고 해도 한 짐칸에 10세대이상 40~ 50명의 사람들이 타야했다.
그러므로 상급의 명령에는 비록 재산, 도구, 살림살이 등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사실은 가지고 갈 수 없었다.
화물차 짐칸에는 물론 침대가 있을 수 없으며 먹을 것을 준비할 설비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짐칸 구석구석에 짐을 쌓아놓고 바닥에는 무엇인가를 깐 뒤 30~ 40명의 남녀노소가 짐승처럼 한데 몰려 자야했으며 먹을 것은 이따금 차가 설 때 밖에 나가 가지고 간 냄비에다 끓여야 했다.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따금 차가 서면 여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 차 짐칸 밖에 나가 밥을 지었으며 남자들은 물을 긷는다, 먹을 것을 사온다 야단법석이었다.
이주민들이 가장 곤란했던 것은 짐칸 안에 변소가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짐칸 안에 있으니 거기서 대소변을 볼 수도 없고 차는 몇 시간을 간 다음에야 섰기 때문에 어른들은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은 큰일이었다.
원동에서 중앙아시아 초원까지는 40여일 걸렸으며 한달 가량 짐차 속에서 살다보니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원동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카자크나 우즈베크를 가자면 지금도 10여 일이 걸린다.
그런데 이주민을 실은 차는 정상운행이 아닌 임시운행이어서 정상열차가 운행이 없을 경우 길을 떠나고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으며 먹을 것이 떨어질 경우 짐칸 바닥에 깐 나무판자를 뜯어먹기도 했다.
도중에서 죽은 사람은 열차가 서면 그곳 주위에 묻어버리고 떠났는데 사망한 사람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아마 수백 명을 훨씬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중도에서 떨어지거나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시베리아 목재판에 들어가 숨어살다가 1950년대 후에야 돌아왔다.
강제이주민이 도착한 곳은 카자크 남쪽 초원과 우즈베크의 동부와 중부 습지였다.
소련정부에서는 이주민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그 무슨 반항활동이나 생길까봐 염려돼 원래 한마을에 살던 고향사람들까지 모두 분산시켰으며, 또 우리민족들에게는 적성민족(適性民族)이라는 비밀딱지를 붙여놓고 정식 주민증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주민증이 없는 사람은 아주 자유가 없어 마음대로 타지역에 왕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군대도 갈 수 없고 국가기관에서 일할 수도 없었다.
돌연히 삶터를 빼앗기고 카자크와 우즈베크 초원으로 이주한 조선농민들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록 이주는 소련정부에서 조직한 것이며 또 이주 관련비 용도도 국가에서 부담하기로 했지만 이주지의 지방정부에서는 국가로부터 내려온 돈을 떼어먹거나 다른 곳에 써버리고 이주민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곳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들집이 없어 부득불 중앙아시아 한파 속에서 며칠씩 노숙하면서 땅굴 등 임시 들 집을 지어야 했으며, 또 무연한 초원과 습지에 들어가 또다시 원동지방에서처럼 갈대를 베고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다.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우리민족 농민들은 카자흐스탄에서는 주로 지르다리야강 상류유역저지에 자리잡고 우즈베키스딴에서는 주로 따슈겐트주 치르치크강 유역과 사마르칸트즈 저지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저지들은 모두 침수지들이어서 개간하는데 여간 힘들지 않았으며 국가에서는 일부 농기계들을 제공해주었지만 침수지를 개간하는데는 큰 도움들 주지 못하였다.
이주민들은 주로 사람의 힘으로 습지에 들어가 갈대를 베고 논두렁을 만들었으며 또 도랑을 파고 치르치크 강물을 끌어다 논을 일구었다.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것인가 보다.
이 엄청난 고난을 겪은 우리민족 이주민들은 낯선 불모지의 개척에 정력을 쏟아 3년 만에 관개수로를 개설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땅을 개간하고 벼농사를 시작하니 살림도 차차 나아지게 되었으며 또 어떤 우리민족 집단농장에서는 소형수력발전소까지 만들어 집집마다 전등불까지 켜게 되었다.
이리떼와 뱀들이 득실거리던 이 무시무시한 갈숲 습지를 옥토로 만들고 마을에 전등불까지 켜는 것을 보고 현지민족과 러시아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다.
우리는 이 갈숲 습지에 자리잡고 살려고 오는 조선사람들을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었다. 우리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습지에서 죽어버리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여기던 그 이주민들이 이런 기적을 창조할 줄은 꿈엔들 생각하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강제이주이후 다시금 발전하던 민족교육과 민족문화사업은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여지없이 파괴를 당했다.
우리민족은 원래 하나님을 믿고, 강한 교육열을 가진, 이름 있는 천손민족으로 비록 알몸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에 쫓겨와 집도 땅도 없는 극히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먼저 교회와 학교들을 세웠다.
강제이주 이듬해인 1938년 우즈베키스탄에는 조선인 학교가 96개소 설립됐는데 그 중 소학교 50개 초중 7년제 학교가 32개, 고중 10년제 학교가 14개나 되었으며 학생총수는 12만여명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소련 중앙정치국의 ‘내부지시’에는 “일부 자산계급 민족주의자들은 민족교육을 발전시킨다는 미명 하에 민족학교들을 꾸리고 있으며 각 민족 아동들에게 자산계급 민족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있다.”며,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들은 소련 각 지역의 공통언어인 러시아어를 배우게 하지 않고 소수민족어를 배우게 함으로써 소수민족 아동들로 하여금 소비예트 생활과 이탈되게 하고 있으며 소비예트 문화와 과학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밝히고 탄압하였다.
따라서 강제이주 후 민족학교를 세울 것을 주장한 사람과 민족학교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산계급 민족주의분자라는 죄명을 쓰고 체포돼 비밀리에 총살당했다.
그리하여 1938-1939년 1년 동안 카자흐스탄 모든 우리민족학교에서는 모든 학과를 러시아어로 학습하기 시작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가 훨씬 넘는 동안 소련내에서는 우리말을 가르치는 학교가 하나도 없게 되었으며 우리말로 된 신문과 잡지도 모두 폐간되었다.
오직 크즐오르다로 옮긴 ‘선봉’신문과 조선인극장만이 천신만고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데, 카자흐스탄의 국립조선극장 (카자흐스탄공화국 연예훈장국립음악희극조선극장)은 지금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선봉’도 처음에는 ‘벼를 위하여’였으나 개칭을 강요당해 ‘레닌기치’로 사용해오다 1992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고려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우리말과 러시아어를 병행 발간하고 있다.
사할린에는 1991년부터 4절지 ‘새고려신문’이 주간으로 2200부 발간되고 있으며 ‘사할린우리말방송’은 매주 월~ 토요일 오후 6시30분부터 30분간 방송이 되는데 국제, 주내, 국내외뉴스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이 민족교육이 소실되고 민족문화가 쇠퇴하니 우리민족 제3세, 제4세들은 모두 모국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더군다나 이주민들은 50년대부터 거주이주의 자유와 함께 생활기반이 튼튼해져 자녀교육을 위해 소련전지역의 도시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민족이 러시아문화로 동화되는 것을 더욱 촉진시켰으며 모국어, 민족역사, 전통문화까지 점차 잃어버린 데다 자기이름까지 러시아식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구 소련에 사는 우리 민족들은 일부가 타쉬켄트나 알마틔 같은 몇 도시와 지역에 집중된 이외에 다수는 모래알처럼 각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러나 구 소련이 해체되고 각 가맹공화국이 독립하면서 우리민족은 또 새로운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우선 과거 소련 땅 내에서는 단일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우리 동포사회는 각 공화국이 분리, 독립됨에 따라 공화국간 상호 긴밀한 유대가 어렵게 되었으며 어쩌면 공화국간 단절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알마틔에 사는 부모와 타쉬켄트에 사는 자식들이 이제는 서로 다른 국민이 되어 돌연간 이산가족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우리나라가 불원간 통일은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동포들의 사회는 중심을 잃은채 갈기갈기 나누어져 또 하나의 작은 소수민족집단을 형성하게 될 위험이 있다.
15개 가맹공화국이 제각기 독립함에 따라 우리동포들은 독립된 공화국의 주체민족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할 시기에 와 있다.
지금까지 우리 동포들은 러시아어만 배우고 러시아습관만 따랐기에 얼굴만 우리민족이지 사실은 러시아인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각 공화국에서 만약 러시아인을 배척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왕왕 그곳의 우리민족들도 함께 재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강제이주 후 50여년간 러시아어만 배워 언어생활의 곤란을 극복했던 우리 동포들은 이제는 과거의 공통어인 러시아어 이외에 거주지에 따라 각 공화국의 언어를 배워야만 사회, 정치생활에서 평등을 얻을 수 있다.
1989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동포들 98%가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2%만이 해당 공화국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거기다가 국제공용어인 영어를 배워야하고 자기민족의 말까지 배워야 하는 이중 삼중의 어려움에 부딪치고 있다.
구 소련 우리민족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소련전역에 ‘고려인협회’같은 우리동포조직이 조직되고 있기는 하지만 각 공화국간의 분리가 심해짐에 따라 우리동포사회도 부득불 분리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있다.
구 소련 전지역에는 46만 이상의 우리동포들이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유목민동포 19만이 살고 있는데 타쉬켄트에 12만명이, 사마르칸트, 부하르등 그 주위 농촌들에는 7만여명이 집거하고 있다.
러시아에는 11만이 살고 있는데 그중 사할린에 4만명이, 하바로프스크의 1만여명을 포함해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시 등 동북지구와 인접한 원동지구에는 북한에서 이사온 사람들까지 모두 2만여명이 살고 있다.
또한 북캅카즈에 2만 여명이, 모스크바에는 4000여명이, 페체르브르그에는 3800여명이 살고 있다.
중국의 신강성과 인접하고 있는 구 소련 전지역 우리동포들의 문화중심이자, 유일한 우리말 신문인‘고려일보’가 발간되고 있는 카자흐스탄에는 유목민동포들이 10만5000이 살고 있는데 수도 알마틔 지구의 1만7000여명을 포함해 , 랄리쿠르칸, 량블, 칠켄트, 크즐오르다 등에도 우리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밖에 타지크스탄에 1만5000여명이, 우크라나이에 1만명이, 백러시아, 르트바니야, 리트비야, 투르멘스탄 등의 나라에도 동포들이 살고 있다.
구 소련에 있는 우리민족들은 중국조선족과 마찬가지로 약70%의 인구가 지금도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최근 구 소련의 우리동포들이 연해주로 다시 돌아와 자치구역을 만들자고 하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원동지구로 다시 이사해 오는 동포들이 점점 증가되는 추세이다.
이와 함께 최근 한국정부가 연해주 남부 파르티잔스크에 대규모 한인공단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은 ‘동북아한민족 경제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본다.